나는 전화벨의 시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수화기를 들었다. 야로슬라브가 보이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만약 그가 있었다면 나는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여보세요?”“........”말이 없었다. 나는 연신 수화기 속을 향해 외쳤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쌔근덕거리는 콧바람 소리만 전선을 타고 들려왔다. 그것은 전선에 묻어있던 전파의 찌꺼기들과 어울려 잡음을 내며 수화기에 고였다. “여보세요 말씀을 하세요.”수화기는 들려 있었다. 나는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여보시오. 할 말이 없으면 끊읍시다.”나는 전화를 끊을 생각에 수화기
“박 부장, 박 부장이 맞아요. 나를 만나자고 했던 그 박 부장이오.”호흡이 짧아졌다.“........”“박 부장이 확실합니다.”나는 말을 잇지 못한 채 나 선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이 사람이 박 인석 맞아?”그는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그리고는 흰 휘장으로 그의 얼굴을 가렸다.오로지 무거운 침묵만이 영안실을 누르고 있었다.‘박 부장이 죽었다면 나는 어떻게 채린을 찾을 수 있을까. 그가 내게 한 말이 모두 거짓일까......’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병원을 나와 나 선배의 차에 올랐다. 그는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이 없었다.
사체는 알아보기도 힘들만큼 난도질되어 있었다. 얼굴 부분에만 십여 군데의 자상 흔적이 남아 있었다. 피 묻은 두 팔은 동아줄에 걸린 젖은 빨래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목에는 예리한 칼날이 파고 든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 칼자국은 손가락이 들어갈 만큼 깊이 파인 채 입을 벌렸다. 그것은 흡혈귀의 입처럼 공기 중을 떠돌아다니는 영혼들을 빨아들이고 있었다.나는 더 이상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지만 나 선배가 나를 끌어 당겼다.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사체 옆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나 선배는 내게 자리를 물려주며 꼼꼼하게 살펴보라는 눈
나는 그곳이 영안실이란 것을 직감했다.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더욱 나를 움츠리게 한 것은 음산한 불빛이었다. 그 불빛은 죽은 자의 영혼처럼 나지막한 지하실에 헌근하게 고여 있었다. 삶과 죽음의 영혼이 뒤섞여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음산한 기분 언저리로 비어져 나온 감정이 죽은 이들의 영혼과 뒤섞여 한판 놀이판을 벌이려는 야릇한 흥분을 느꼈다. 죽은 자에 대한 연민보다 아직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희열이었다. 나는 취재차 영안실에 들어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런 감정을 느껴왔다. 내장이 썩는 냄새를 역겹게 맡으면서도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즉시 줄 잡힌 비로드 치마 같은 커튼을 열어 젖혔다 .창밖에는 새벽바다가 짙게 깔린 운무에 눌려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운무는 솜사탕같이 감미로운 손길로 해변의 파도를 농락했다. 그럴 때마다 파도는 헐떡거리다 곧이어 미친 듯이 달아났다.이중으로 된 창문 너머로 싸늘한 바람이 지나갔다. 나는 기지개를 켜고 냉수로 간단히 샤워를 했다. 싸늘한 냉기가 온몸에 달라붙어 근육을 긴장시켰다.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도시가 밤새 조여 온 한기에 후르르 몸을 떨었다.이곳은 도시 전체가 중앙난방식으로 보온이 이루어지고 있
“페레스트로이카. 좋지요.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미국 개가 러시아 개에게 물었답니다.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해서 얘기를 좀 해달라고. 그랬더니 러시아개가 어떻게 대답했는지 아십니까?”“글쎄요.”“이렇게 대답했답니다. 글쎄. 그들은 매우 오랫동안 쇠사슬로 나를 묶어놓았단다. 이젠 나도 내가 원할 때 짖을 수가 있게 됐단다. 하지만 그들은 내 저녁 밥그릇을 더욱 멀리 옮겨다 놓았지 뭐니 라고 말입니다. 고르바쵸프의 개혁은 스탈린 시대부터 방향이 잘못 잡힌 것을 수정한 것에 불과하지요. 본래의 혁명정신으로 복귀한다고나 할까. 그러다보니 한
그는 눈을 내리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예, 한 달에 1백 달러를 받으며 러시아 문화사를 강의했죠. 1917년 시월혁명을 중심으로 한 문화사를 강의했는데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로 체제가 무너진 뒤에는 할 일을 잃게 됐죠.”“........”“그래서 자본주의 상술을 배울 욕심에 이 길로 뛰어들었죠.”“이런 일을 하면서 어떻게?”“가장 빠른 방법이죠. 어떤 사회나 혼란기에 노다지가 굴러다니는 법이거든요. 시기를 놓치면 다시 오지 않죠. 사회적 혼란기가 지나가면 급성장이란 사실 불가능하죠. 그래서 이일을 시작했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나는 다시 보드카를 두어 모금 더 목구멍에 털어 넣고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얼큰한 취기가 핏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무색투명한 보드카의 불길이 하얀 얼굴에 화색을 돌게했다. 내가 뱉은 쓴 말들이 술에 녹아 그의 얼굴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는 거의 술병이 바닥을 들어낼 때쯤에야 말문을 열었다.“선생님이 기자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그가 무거운 입을 열고 내뱉은 첫마디였다. “그렇소.”“아, 그렇군요.”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다소 얕잡아보는 듯한 눈빛이 동공주변으로 번져갔다. 자신의 예
‘드뇸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이 단어가 채린의 납치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걸까? 나 선배에게 물어 볼까? 아니야 그에게 물어본다면 도리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드뇸, 왜 채린이 메모지에 드뇸이란 말을 써놓았을까? 마피아들의 마약 거래와 깊은 관련이 있을까?’나는 싸늘한 냉수를 들이켜고 아랫배가 아려오면 욕실 변기에 걸터앉아 또다시 시간을 찢었다.‘드뇸, 오후에, 점심때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내 생명을 한 방울씩 앗아가는 아픔으로 다가왔다. 그것이 한 방울씩 무게를
‘드뇸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이 단어가 채린의 납치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걸까? 나 선배에게 물어 볼까? 아니야 그에게 물어본다면 도리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드뇸, 왜 채린이 메모지에 드뇸이란 말을 써놓았을까? 마피아들의 마약 거래와 깊은 관련이 있을까?’ 나는 싸늘한 냉수를 들이켜고 아랫배가 아려오면 욕실 변기에 걸터앉아 또다시 시간을 찢었다. ‘드뇸, 오후에, 점심때 …….’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내 생명을 한 방울씩 앗아가는 아픔으로 다가왔다. 그것이 한 방울씩 무
그때까지 숲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나 선배는 무릎까지 차오른 풀섶을 헤치며 걸어 나왔다. “쥐새끼 같은 놈.”그는 연신 알아들을 수 없는 푸념을 내뱉고 있었다.“하수인을 시켜 우리의 동정을 살핀 거야. 나쁜 새끼, 속았어.”나 선배는 혼자 말을 계속했다.우리는 그 길로 기바리쏘워 따차지대를 뒤졌지만 채린을 찾지 못했다. 폐허가 된 따차는 물론 그곳 사람들에게 그녀가 있을만한 곳을 물었지만 그들은 모른다는 대답으로 일관했다. 현지인들은 우리가 찾고 있는 채린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그들은 따차에서 고개를 삐죽이 내민 뒤
사실 러시아인들의 시간관념은 빡빡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중국계들만큼이나 질긴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러시아의 영토는 1천7백7만여 평방킬로미터에 달했다. 한반도 전체면적이 22만 평방킬로미터인 점을 감안할 경우 무려 77배나 됐다. 극동에서 유라시아에 걸쳐있는 국토의 동서길이가 9천 킬로미터, 남북이 2천5백에서 4천 킬로미터 정도였다. 모스코바에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열차로 일주일을 달려야 하며 비행기로는 9시간 이상을 날아야 했다.그러나 이런 시간 개념도 최근의 일이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열차가
따차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토지는 물론 국유지였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가 토지활용의 효율성을 드높인다는 취지에서 일반 독립 가정에 3백 평 남짓한 대지를 무상 분양했다.주민들은 그곳에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집을 짓고 주말농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것들은 생김새나 규모 ,색깔 등이 제각각이었다. 겉보기에 제법 그럴듯해 보이는 것도 있었고 초라할 정도로 엉성한 따차도 있었다. 따차를 가꾸고 꾸미는 것도 스스로의 몫인 탓에 유난히 세련되게 꾸민 곳도 종종 눈에 띄었다.잘 꾸며진 따차는 창문에 복고적인 레이스가 장식된 커튼이 드리
그의 손에 들려진 팩스용지는 검게 그을려 있었다. 사진은 형체도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나 선배는 실망하는 기색이 확연했다. 길게 숨을 내쉬었다.“장 기자 미안하지만 영사관에 잠시 들린 뒤 기바리쏘워로 가자고. 내가 책임지고 그곳까지 모실께.”“.......”그는 나를 끌듯이 일으켜 세우고 호텔 룸을 나섰다.시간이 맥없이 미끄러져 가는 것 자체가 나를 불안하게 했다. 나는 나 선배에게 박 부장의 신원을 확인하는 일은 말리지 않겠지만 내 시간을 더 이상 빼앗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장 기자는 외부사람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준 적 없어?”“없어요. 있다면 극동대에 전화를 건 적이 있죠.”“극동대? 누구에게.”“따냐 교수가 보이지 않아......”“따냐, 같이 동행했던 여교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이 시간이 갈수록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게는 기분 나쁜 일이지만 그에게는 그리 기분 나쁠 것도 없을 것 같이 생각됐다.“혹시 그 장소로 나올 때 어떻게 하란 말은 없었어. 이를테면 여비를 충분히 가지고 나오라든가 아니면..... 혼자 나오라든지.”“혼자 나오란 말은 있
" 뭐라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다고, 무슨 말이야, 지금 블라디보스토크 근처로 오고 있는데.”“..........”“회의 때문에 올 수가 없을 거라고? 서울 본사에 확인해 본 결과인가?”“...........”“3일 전에도 그곳에서 전화가 왔었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그게 확실 해?”그는 도리어 영사관 직원들의 확인 사실을 믿기 힘들다는 말투였다. 거듭해서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고개를 갸웃거렸다.“그럼 말이야 그 친구 신원하고 사진을 이쪽으로 보내달라고 요구해.팩스로 알아듣겠지? 사진은 알아볼만한 크기로.”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 사람에게서 언제 연락이 왔어?”“잠시 전에 전화가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고”“글쎄요.”그의 말소리가 빨라지고 있었다.“그렇다면 김 선생이 있다는 곳이 어디야.”“그곳은 알려드리기가.”“무슨 얘기야.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이곳은 서울이 아니라 러시아란 말이야 러시아.”그는 더욱 언성을 높였다.“그곳이 어디냐니까?”“기바리쏘워 근처.”“언제 만나기로 했어.”“오후 1시30분.”나 역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약속 시간이 불과 두 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는데 꼬치꼬치 캐묻는 그가 탐탁지 않았다. 나는 나 선배와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머리끝이 쭈뼛 일어서며 알리에크의 주검이 순간 섬광처럼 스쳤다. 죽음의 그림자가 긴 복도를 따라 내게 몰려오고 있다는 야릇한 기분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드라이아이스의 한기가 내 몸 주위를 휘감았을 때 느끼는 그런 감지였다. 두려움은 뿌리쳐도 좀체 떨어질 것 같지 않은 힘으로 나를 빨아들였다.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발걸음을 돌렸다. 그들을 힐끗힐끗 돌아보며 구두를 신었다. 그들이 나를 뒤쫓아 온다면 미친 듯이 내방 쪽으로 달아날 생각이었다. 그들의 추적을 피할 수 없다면 나는 돌아서서 권총을 들이댈 생각이었
“정확한 것은 만나서 말씀드릴께요. 전화로 깊은 얘기는 곤란합니다.”“.........”“지금 기바리쏘워 지역으로 나오실 수 있겠어요, 저도 그 쪽으로 나갈 테니까요.”“기바리쏘워?”“기바리쏘워로 오시는 길은 간단하니까 걱정 마시고 고속도로에서 그 지역 들어가는 입구에 오시면 됩니다.”“예 기억하겠습니다.”“약속 시간은 오후 1시30분.”“예. 오후1시30분 기바리쏘워로 들어가는 도로변 …….”“아! 한 가지 잊은 것이 있습니다. 이곳 사정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누구와도 이런 얘기를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매사에 신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