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114]
탈북자 [114]
  • 이광희
  • 승인 2019.01.18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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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러시아인들의 시간관념은 빡빡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중국계들만큼이나 질긴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러시아의 영토는 177만여 평방킬로미터에 달했다. 한반도 전체면적이 22만 평방킬로미터인 점을 감안할 경우 무려 77배나 됐다. 극동에서 유라시아에 걸쳐있는 국토의 동서길이가 9천 킬로미터, 남북이 25백에서 4천 킬로미터 정도였다.

모스코바에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열차로 일주일을 달려야 하며 비행기로는 9시간 이상을 날아야 했다.

그러나 이런 시간 개념도 최근의 일이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열차가 변변치 못해 20여일을 꼬박 열차 속에서 살아야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놓이기 전까지만 해도 모스크바에서 말을 타고 6개월을 달려야 부동항이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의 푸른 바다를 볼 수 있었다.

농담 삼아 하는 얘기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중앙정부까지 결재서류를 올린다 해도 줄잡아 보름이 걸려야 답신이 오고 여기에다 한두 가지 첨삭을 하게 되면 제대로 된 공문을 접수하는데 한 달 이상의 시간이 허공 속으로 사라진다는 계산이었다.

이런 공간과 시간개념 탓에 이들은 생전 바쁜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이 느긋했다. 멀리 있는 친구가 방문을 한다고 일정을 통보해도 현장에 도착해야 오는 것이지 오기 전까지는 믿지 않았다.

대륙적 근성부터 배워 시간관념이 무뎌진 걸까. 아니면 그의 신변에 무슨 이상이 생긴 걸까. 그렇다면 채린이 있는 곳을 듣지도 못하고. 박 인석은 오고 있을 거야. 그를 만나면 우선 반갑게 인사를 하고 그리고는 곧바로 기바리쏘워로 안내해 줄 것을 종용하자. 채린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 그녀를 데려간 놈들이 총부리를 겨누고 있지는 않을까. 아니면 사방에선 낯선 벽들이 숨통을 조이는 공간에 감금된 채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녀에게 역겨운 일을 시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 몸이 건강치 못해 그런 어려움을 견딜 수 있을까. 오늘의 아픔도 시간이 지나면 잊힐 거야. 모든 일들이 시간이 지나면 그렇듯이 아픔도 세월에 묻히고 슬픔도 흐르는 물처럼 씻길 거야. 부디 건강만 해준다면 좋겠어, 혹 건강이 약화됐다 해도 만나기만 하면 건강도 곧바로 회복될 수 있을 거야.’

내가 두서없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한 사내가 잿빛 야마하 승용차를 몰고 우리가 선 지점으로 다가왔다.

나는 박 인석이 왔다며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멈춰선 승용차에서 고개를 삐죽이 내민 사내는 갈색 눈을 가진 현지인이었다. 그는 야로슬라브에게 다가와 시꾸어또보지역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나를 한참동안 아래위로 훑어봤다. 나의 생김새와 옷차림 등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의 백발 머릿속에 감추어진 골수마다 입력을 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야로슬라브는 귀찮다는 듯이 턱 끝으로 계속 갈 것을 일렀다. 그는 평소 내게 보였던 민첩하고 살쾡이 같은 행동과는 달리 눈을 감고 넋을 놓고 있는 듯이 보였다. 의도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긴장된 모습이라고는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러시아 국영방송에서 흘려보내는 시끄러운 라디오 음악에만 귀를 세우고 성냥알갱이를 질긍질긍 씹고 있었다. 그는 흥겨운 음이 흘러나올 때마다 코를 벌름거렸다.

그에게 길을 물었던 사내는 퉁명스런 행동에 입맛이 가셨는지 못마땅한 모습으로 강한 파열음을 토하며 곧장 내달렸다.

그의 차는 순식간에 눈에서 멀어져 갔다. 그가 가고 난 뒤 고무타이어 타는 냄새가 역겹게 바람에 실려 왔다.

우리는 그렇게 두어 시간을 기다림 속에 보냈다. 하지만 박 인석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다리가 저려 옴을 느꼈다. 박 인석이 정말 안 올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무너지는 절망감이 엄습했다.

두 어깨가 날갯죽지 꺾인 새처럼 내려앉았다. 길게 호흡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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