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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111]
탈북자 [111]
  • 이광희
  • 승인 2019.01.11 09: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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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손에 들려진 팩스용지는 검게 그을려 있었다. 사진은 형체도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나 선배는 실망하는 기색이 확연했다.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장 기자 미안하지만 영사관에 잠시 들린 뒤 기바리쏘워로 가자고. 내가 책임지고 그곳까지 모실께.”

“.......”

그는 나를 끌듯이 일으켜 세우고 호텔 룸을 나섰다.

시간이 맥없이 미끄러져 가는 것 자체가 나를 불안하게 했다. 나는 나 선배에게 박 부장의 신원을 확인하는 일은 말리지 않겠지만 내 시간을 더 이상 빼앗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참았다.

영사관으로 향하는 차 속에서 나는 몸을 뒤척였다. 야로슬라브는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나 선배는 영사관에 도착즉시 실망스런 얼굴로 투덜거리며 팩스용지를 들고 왔다.

이게 뭐야? 사진이 너무 작은고 전송상태가 좋지 않아.......”

그의 손에 들려진 팩스 용지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사진이 불에 그을린 모습으로 담겨있었다. 그나마 사진이란 것을 알 수 있었던 것도 이마 부분과 코 끝부분에 희미한 선이 남아 있어서였다.

이것으로는 알아 볼 수가 없을 거야.”

그는 겸연쩍게 그 용지를 내게 내밀었다. 영상이 검게 탄데다 음영만이 묻어있어 사람을 알아 볼 수는 없었다. 내 사진을 그렇게 보내왔다 해도 알아보지 못했을 것 같았다.

이 상태로 어떻게 사람을 알아보겠어요?”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 사람 전화번호 가지고 있어? 주소나…….”

나 선배는 풀이 꺾인 것처럼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추측이 틀렸다고 단정 짓기에는 이르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내심 자신의 추측이 결코 빗나가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하고 있는 눈치였다.

예 여기.”

나는 수첩을 뒤졌다.

나홋카 4가 포토바야 25번지. 전화번호 5-066-1032”

그는 전화번호와 주소를 메모해 옆에 있던 영사관 직원에게 건네주며 확인을 의뢰했다. 그는 또 영사관 직원에게 조심스럽게 알아볼 것을 주문한 뒤 자신의 권총을 챙겨 영사관을 나섰다.

아무튼 그리로 가자고. 그리고 자네는 영사님께 기바리쏘워로 출발했다고 보고 드려. 차 대기시키고 택시로.”

우리를 태운 택시는 시내를 가로질러 기바리쏘워 지역으로 내달렸다.

택시는 야로슬라브가 몰았다.

그는 검은 모자를 뒤집어쓰고 사막을 가로지르는 광풍같이 차를 몰았다.

시계가 1210분을 가리켰다.

나 선배와 나는 각기 다른 창밖을 응시하며 말이 없었다.

나 선배는 왜 박 인석을 의심하는 거지? 이곳 생활에 익숙해진 나머지 모든 사람을 의심하는 걸까? 박 인석이 나를 속였을까? 그럴 리가 없지. 그가 굳이 나에게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접근해올 이유가 없지. 아니 나는 그를 우연히 만났는데 어떻게 그가 나를 속일 수 있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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