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머리끝이 쭈뼛 일어서며 알리에크의 주검이 순간 섬광처럼 스쳤다. 죽음의 그림자가 긴 복도를 따라 내게 몰려오고 있다는 야릇한 기분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드라이아이스의 한기가 내 몸 주위를 휘감았을 때 느끼는 그런 감지였다. 두려움은 뿌리쳐도 좀체 떨어질 것 같지 않은 힘으로 나를 빨아들였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발걸음을 돌렸다. 그들을 힐끗힐끗 돌아보며 구두를 신었다. 그들이 나를 뒤쫓아 온다면 미친 듯이 내방 쪽으로 달아날 생각이었다. 그들의 추적을 피할 수 없다면 나는 돌아서서 권총을 들이댈 생각이었다.

나는 그들의 발자국 소리에 귀를 곤두세우고 슬금슬금 내 방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들의 발자국 소리가 빨라지거나 조급하게 움직이면 그것을 신호 삼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몇 개의 방을 지날 때쯤 엘리베이터를 타고 싱겁게 내려가 버렸다. 나는 그제야 숨을 돌리고 이마에 비어져 나온 땀을 씻어 내렸다.

그렇지만 불길한 예감은 여전히 나를 뒤쫓고 있었다. 피 묻은 옷과 맥이 풀린 채 휘둥그렇게 뜬 알리에크의 눈빛, 그 비린내. 미지근한 선혈. 이런 모든 것들이 망령처럼 나를 따르고 있었다.

나는 키를 두고 나온 사람처럼 황급히 방으로 향했다.

그제야 야로슬라브는 내가 없어진 사실을 깨달았는지 룸을 박차고 뛰어 나왔다. 옷에 단추도 제대로 잠그지 못한 채였다. 머리에서는 찬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는 내가 자신을 따돌린 채 어디로 갔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내가 룸을 향해 다가서고 있는 모습을 보고서야 어깻죽지를 떨구며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룸으로 돌아온 즉시 영사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나 선배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수화기를 들고 한참동안 망설였다. 복도에서 만난 사내들을 보고 놀란 가슴이 그때까지 두근거렸다. 그러다 무슨 얘기 끝인지도 모르게 채린이에 대한 중요한 첩보를 구했다고 불쑥 내뱉었다.

뭐야, 어디있는지도 안다고?”

그 역시 내말을 듣고 크게 놀라는 기색이었다. 음성이 떨렸다.

어디서 그런 첩보를?”

나는 멈칫 거렸다. 박 부장이 내게 들려준 말들이 깨알같이 떠올랐다. 하지만 누가 내게 말해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박 부장과의 약속도 약속이지만 내가 그런 사실마저 얘기한다면 그는 필시 나를 앞세우고 그곳에 가려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대답을 늦춘 채 수화기를 들고 서 있었다.

누구야?”

나 선배가 다그치듯이 물었다.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잘 아는 사람.”

지금 상황을 알고나 하는 소리야. 장기자도 납치당하고 싶어 안달난거야?”

나 선배는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나를 몰아세웠다. 더 큰일을 당할 수 있다고 침이 마르도록 경고했다.

나홋카에 있는 박 인석이란 상사 주재원…….”

엉겁결에 박 부장에 대한 말이 튀어나왔다. 숨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란 생각이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박 인석?”

서울에서 이곳에 파견 나와 있는 사람인데. 잘 아는 사이죠.”

어떻게

지난번에 왔을 때 사귀었던 사람이니까.”

그 사람이 어떻게 김 선생의 거처를 안단 말이야?”

북한 상사원에게 들었답니다.”

그래?”

그는 가쁜 호흡을 토하며 말했다. 적잖게 흥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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