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116]
탈북자 [116]
  • 이광희
  • 승인 2019.01.23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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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뇸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이 단어가 채린의 납치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걸까? 나 선배에게 물어 볼까? 아니야 그에게 물어본다면 도리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드뇸, 왜 채린이 메모지에 드뇸이란 말을 써놓았을까? 마피아들의 마약 거래와 깊은 관련이 있을까?’
  나는 싸늘한 냉수를 들이켜고 아랫배가 아려오면 욕실 변기에 걸터앉아 또다시 시간을 찢었다.
  ‘드뇸, 오후에, 점심때 …….’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내 생명을 한 방울씩 앗아가는 아픔으로 다가왔다. 그것이 한 방울씩 무게를 더할수록 내 시름의 무게도 늘어가고 있었다. 나는 변기의 물을 괜스레 두어 차례 씻어 내렸다. 막연히 소리의 시원스러움을 느끼고 싶다는 충동에서였다. 그것을 통해 채린에 대한 불길한 예감도 씻고 싶었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변기 속으로 소용돌이치며 빨려 들어가는 물처럼 나를 끌고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채린은 이미 어디에도 없을 것 같다는 방정맞은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녀가 남겼던 메모도 이제는 시효를 다했을 것 같았다. 그녀가 그토록 갈구했던 모습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나를 괴롭혔다.
  간절히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녀의 바람, 침대난간에 꽂아둔 그리움의 성의, 처절하리만큼 긴박하게 다가서고 있는 좌절. 이런 모든 것들을 기록하고 메모할 마음의 여유도 잊어버렸을 것이다.
  채린과 나를 엮고 있는 인연의 고리가 서서히 그것도 아주 서서히 끊어져가고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수명을 다한 쇠사슬이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스스로 고리를 떨어뜨리듯 우리는 또 그렇게 인연의 고리를 놓고 있을 것 같았다.
  채린은 이미 혼자만의 삶을 찾아 나섰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기다리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해 어디론가 훌쩍 떠나 버렸을 것 같았다. 기다림에 지친 아이처럼.
  나는 변기를 걷어차고 룸으로 돌아온 뒤 딱딱한 나무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러다가도 채린의 생각이 떠오르면 돌연 설 미친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침대에 몸을 던지고 천장의 낡은 무늬를 올려다봤다.
  야로슬라브는 내 행동이 탐탁찮았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연신 담배를 빼물었다.
  나는 그냥 이렇게 있다간 미쳐버릴 것 같았다. 누구를 잡고서라도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가슴 가득히 고여 있는 울분을 누구에겐 가는 털어놓아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나는 냉장고를 뒤져 보드카와 팝콘, 그리고 치즈조각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보드카 술병을 거꾸로 세우고 벌컥 한 모금을 털어 넣었다. 화끈한 알코올의 열기가 도화선이 타들어 가듯 목을 태우며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한잔하시오. 우리가 같은 방에서 숨을 쉬고 있음에도 서로 말이 없다는 것이 너무 멋쩍지 않소. 당신도 참 재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이오. 내가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말할 생각조차 하지 않으니…….”
  “.........”
  그는 내가 건네준 술병을 들고 잠시 망설이다 투명한 액체를 한 모금 들이켰다.
  “당신은 도대체 무엇 하는 사람이오?”
  나는 생각에도 없던 말을 불쑥 내뱉었다.
  “...........”
  “아니 내가 묻고 있지 않소, 처자식은 있소?”
  “.........”

  그는 다시 술병을 한차례 거꾸로 세운 뒤 내게 건네주었다.
  “말을 할 줄 모르는 거요. 아니면 아예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거요?”
  그제야 그가 싱긋이 웃었다. 그와 만난 지 며칠이 지났음에도 그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정확하게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솔직히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이도, 고향도, 그리고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다만 그가 알렉세이의 조직에 몸담고 있다는 것과 그의 명령에 따라 내 방에 와 있다는 것만을 알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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