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19-04-19 17:12 (금)
탈북자 [120]
탈북자 [120]
  • 이광희
  • 승인 2019.02.11 10: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즉시 줄 잡힌 비로드 치마 같은 커튼을 열어 젖혔다 .

창밖에는 새벽바다가 짙게 깔린 운무에 눌려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운무는 솜사탕같이 감미로운 손길로 해변의 파도를 농락했다. 그럴 때마다 파도는 헐떡거리다 곧이어 미친 듯이 달아났다.

이중으로 된 창문 너머로 싸늘한 바람이 지나갔다. 나는 기지개를 켜고 냉수로 간단히 샤워를 했다. 싸늘한 냉기가 온몸에 달라붙어 근육을 긴장시켰다.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도시가 밤새 조여 온 한기에 후르르 몸을 떨었다.

이곳은 도시 전체가 중앙난방식으로 보온이 이루어지고 있어 어느 곳 하나 따뜻한 구석이 없었다. 호텔 종업원은 배관수리 때문에 더운 물을 공급하지 못하고 있다고 둘러댔지만 그것이 낯 뜨거운 상황을 모면하려는 그의 임기응변식 술책임을 알고 있었다. 현지인이 영하 40도를 곤두박질치는 한겨울에도 따뜻한 물 한 방울을 구경할 수 없다고 내게 귀띔을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매일같이 이가 시린 냉수를 뒤집어쓰며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나, 호텔에 유달리 을씨년스런 냉기가 가득 고여 있는 것도 이런 탓이었다. 이곳에 온 뒤 머리카락이 뽑힐 것 같은 한기를 감내하며 샤워를 했다.

내가 주르르 흘러내리는 물을 털며 욕실 문을 나섰을 때 나 선배가 호텔로 찾아왔다.

이른 아침부터 웬 일입니까. 전화도 없이.”

같이 가야할 곳이 있어서 왔어. 빨리 서둘러.”

그는 그 때까지 침대를 뒹굴고 있던 야로슬라브를 두들겨 깨웠다. 그러자 야로슬라브가 거구정한 모습으로 일어나 앉았다. 얼굴이 부석부석하게 부어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가보면 알 수 있어.”

불길한 예감이 순간적으로 스쳤다.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읍니까. 혹시 채린에게.”

그런 것은 아니야.”

나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사실 오늘 새벽에 이곳 경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어. 한 사내가 피살됐다고, 그런데 피살된 사내가 공교롭게도 .....”

어떻다는 겁니까?”

그냥 김 선생의 실종과 관계가 있을 것 같아서. 시간이 없어. 빨리 가자고. 아참 이 친구 알아?”

나 선배는 속주머니에서 팩스용지를 꺼냈다. 그곳에는 낯선 사내의 사진이 담겨있었다.

모르겠는데요.”

자세히 봐.”

처음 보는 사람인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선배는 다시 팩스 용지를 되받아 자신의 속주머니 속에 넣었다. 말없이 룸을 나갔다.

나 선배는 먼저 룸을 나선 뒤 복도에서 우리를 기다렸다.

피살된 자가 누굴까. 왜 내게 같이 갈 것을 재촉하고 있는 걸까?’

나는 옷을 챙겨 입고 나 선배의 뒤를 따라나섰다.

나 선배가 우리를 데려간 곳은 도심에서 약간 떨어진 변두리의 작은 병원이었다. 낡고 우중충한 건물 외벽에 붉은 십자 표시가 희미하게 남아있어 이곳이 병원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적십자 표시는 덕지덕지 칠해진 페인트가 비늘처럼 떨어져 나간 뒤의 흔적으로 남아있었다.

나 선배는 병원의 모퉁이를 돌아 으슥한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눅눅하게 습기를 머금은 바닥이 예민하게 발끝에 와 닫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