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시 보드카를 두어 모금 더 목구멍에 털어 넣고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얼큰한 취기가 핏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무색투명한 보드카의 불길이 하얀 얼굴에 화색을 돌게했다. 내가 뱉은 쓴 말들이 술에 녹아 그의 얼굴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는 거의 술병이 바닥을 들어낼 때쯤에야 말문을 열었다.

선생님이 기자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가 무거운 입을 열고 내뱉은 첫마디였다.

그렇소.”

, 그렇군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다소 얕잡아보는 듯한 눈빛이 동공주변으로 번져갔다. 자신의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실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서방세계에서는 기자란 직업이 좋은 직업인 모양입니다. 그렇게 들었거든요. 하지만 러시아에서는 기자는 별것 아니죠. 당 기관지에 선전문구나 쓰는 인탤리겐치아에 불과했으니까요. 사람대접을 못 받는 직업이거든요.”

왜요?”

글을 잘 못쓰면 내버려 두지 않거든요. 이곳 블라디보스토크에서만 소련체제 붕괴이후 여러 명의 기자들이 실종됐어요. 실종이야 말이 실종이지 죽여 없애는 거지만.”

누가?”

그야 뻔하죠. 구체제에 몸담았던 경제특권 계급들이죠. 체제는 붕괴됐지만 관계법이 사라진 것은 아니거든요. 그들이 지금도 건재하고 또 기회를 독식하고 있죠. 그들 가운데 신흥 재벌이 나오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죠.”

그렇다면 그들이 공산당 고위 관료들…….”

아니요 단순한 공산당 관료들이야 별 볼 일 없게 됐죠. 그들도 우리나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공산당 관료이면서 경제특권을 누려왔던 족속들. 생산 공장을 독점하고 있는 놈들, 상거래를 담당했던 관료들 이런 놈들이 KGB를 등에 업고 인허가를 미끼삼아 돈벌이에 나서고 있으니까요.”

그들이 왜?”

눈에 거슬리니까요. 시쳇말로 조직원을 시켜 없애 버리라고 한마디만 하면 그만이죠. 그날로 끝장이 나죠. 쥐도 새도 무르게. 그야말로 실종되는 거죠. 얼마 전에도 신문사 편집장이 건물 옥상에서 떨어져 숨진 채 발견됐죠. 당국에서는 그 사건을 단순한 사고사라고 결론지었지만 주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경제특권 계층들이 자신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자 살해한 뒤 건물에서 떨어뜨린 것으로 믿고 있죠. 숨진 편집장이 평소 특권 계층들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를 게재한 적이 있거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직업은 뭐요?”

그는 취기가 감도는 얼굴로 빙긋이 웃었다. 그는 쓴 입맛을 다신 뒤 눈을 끔벅거렸다.

저는 이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살다니요?”

선생님 신변 보호해드리며 산다는 얘기지요. 다른 직업이 뭐 있나요.”

그렇지 않을 것 같은데요. 당신도 인탤리겐치아 아닙니까. 그렇게 보이는데요. 전직이라도 있을 것 아닙니까?”

그는 순간 얼굴색을 바꾸며 술병을 거꾸로 새웠다. 그는 갈증을 느끼는 사람처럼 술을 벌컥벌컥 들이켠 뒤에야 병을 내려놓았다. 어떤 알 수 없는 분노에 떨고 있었다.

당신의 말투로 봐서 분명 인탤리겐치아로 살았을 것 같은데…….”

“.........”

그는 한동안 말을 뱉지 않았다. 언어를 절제하기 위해 애쓰는 고승같이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그러다 잠시 동안의 정적을 깨며 그가 불쑥 내뱉은 말은 러시아 문화사였다.

러시아 문화사? 그렇다면 대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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