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였다. 알렉세이가 올라간 2층 방에서 전화벨이 탁상시계 같이 요란하게 울렸다. 나는 벨소리에 놀라 풀 먹인 삼베처럼 빳빳하게 정신을 가다듬었다. 벨소리가 멎자 알렉세이의 목소리가 총격전을 벌이는 비디오 효과음과 함께 뒤섞여 문틈을 비집고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그의 목소리는 의도적으로 목젖을 누르고 조심스럽게 내뱉는 그런 말투였다. 나는 2층을 힐끗거리며 거실에 있던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알렉세이가 생소한 목소리의 사내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뭐야? 김 채린을 드뇸에 알세니에프 박물관 앞으로 보내겠다고?” “예. 낮12시 지
“간호사 지혈제는?”“주사했습니다.”“맥박은?”“아직은 정상이지만......”“정상이지만?”“갈수록 낮아지고 있어요.”“혈압은?”“혈압도…….”“산소 호흡기 준비해. 그리고 수혈할 수 있도록 혈액도 충분히 준비하고, 혈액형이?”“AB형”“혈액부족은 없겠구먼……. 아무튼 잠시도 눈을 떼서는 안 돼. 보호자분도 마찬가집니다. 어떤 사태가 발생할지 모르니까. 깨어날 때까지 잠시도 눈을 떼서는 안 될 겁니다.”“알았습니다.”당직 의는 궂은 땀을 흘리며 채린의 얼굴에 산소마스크를 씌우고 차트에 자신의 소견을 적었다. 그리고는 지혈제와 영양제
그는 혼자 말처럼 중얼거리며 무겁게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물을 수가 없었다. 손에 쥐고 있던 권총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팔을 떨구었다.알렉세이는 2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며 뒷모습을 감추었다.‘채린이 살아 있다니’그러자 긴장됐던 근육이 일순간에 물먹은 휴지같이 맥이 풀렸다.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싶었다. 권총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팔이 늘어졌다. “채린이 정말 살아있을까?” 눈물이 울컥 솟구쳤다. 그녀를 찾아 지금까지 숨 막히게 달려온 순간들이 우박같이 쏟아졌다. 채린의 실종을 알렸던 따냐의 다급
알렉세이는 그의 등을 다독거렸다. 그리고는 꼴레뜨네프의 얇은 두 볼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꼴레뜨네프의 얼굴은 비애로 번들거렸다. 그는 종아리를 맞는 아이처럼 선처를 갈망하는 눈으로 알렉세이를 올려다봤다.알렉세이는 허리를 굽혀 무릎을 꿇고 있던 그를 끓어 안고 볼에 자신의 볼을 가져가 비볐다.“사랑한다. 꼴레뜨네프”그제야 꼴레뜨네프가 숨을 돌렸다. 그는 다시 알렉세이의 발에 엎드려 어깨를 떨었다. 그 때였다. 알렉세이는 다른 손으로 테이블 밑에 숨겨 둔 권총을 뽑아 꼴레뜨네프의 정수리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
내가 알렉세이의 별장 거실로 들어갔을 때 그는 사각진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꼴레뜨네프와 마주 앉아 있었다. 그들은 눈싸움을 하듯 말이 없었다. 서로가 서로의 눈을 응시할 뿐이었다. 눈빛이 마주치자 섬광이 번득였다.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초원의 왕좌를 놓고 으르렁거리는 두 마리의 수사자를 보는 것 같았다. 그들의 눈빛은 맹렬했고 사나웠다. 주체하기 힘든 긴 침묵이 두 사람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알렉세이는 미간을 얇게 찌푸리고 연신 회갈색 눈알을 번득이며 마주앉은 꼴레뜨네프를 노려봤다. 그는 내가 성난 모습으로 거실에 들어선 것조
거꾸로 물구나무를 선 것처럼 피가 얼굴로 치솟았다. 모든 것이 어수선했다. ‘김천수의 말처럼 박 인석을 살해한 것도 그였을 거야. 그가 나를 만나기 위해 기바리쏘워로 온다는 것을 야로슬라브가 보고하자 즉시 친위대란 놈들을 시켜 살해토록 했을 거야. 박 인석이 자신들의 뒷얘기를 너무 많이 알게 되자 그를 살해했을 거야. 또 그는 박 인석 그리고 채린마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으리만큼 잔인하게.......’나는 알렉세이를 만난 뒤 취해야 할 행동을 시나리오를 적어 내려가듯 치밀하게 구성했다.‘우선 그의 별장에 들어간 다음 나는 생경한 얼
나는 날짜별로 꼼꼼하게 메모한 노트를 탁자 위에 던졌다. 난마같이 얽힌 사건에 대한 실마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살인자들, 그리고 그들에 의해 죽어 간 사람들, 그들의 얼굴이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렸다. 채린의 얼굴이 더욱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자 가슴 속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던 배신감이 혈관을 타고 올라 정수리에 엉겼다. 그것들은 나에게 더욱 흥분할 것을 종용하며 중추 신경을 자극했다. 신경세포 하나 하나를 물고 내 몸이 충분한 반응을 보일 때까지 나를 괴롭힐 심산이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원형탈모증 같이 머리카락을 한 웅
[17] 응징호텔로 돌아온 나는 공항에 전화를 걸었다. 다음 한국행 비행기가 언제 있는 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일주일 후에나 다시 출항한다는 것이 공항 당국자의 말이었다. 다만 그는 하바롭스크에서 출항하는 비행기가 있으니 그편을 이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조언했다.의자 등받이에 고개를 젖혔다. 김천수의 말을 회상하고 있었다.“폐따차에는 모두 여덟 명의 탈출자들이 흩어져 숨어 있디요. 보시는 것 같이 사는 것이 말이 아님네다.”“식량문제는 어떻게 해결하고 있습니까?”“그저 그렇게 죽지 못해 살고 있디요. 낮에
“하스볼라토프 홍?”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하스볼라토프 홍. 그자였다. 블라디미르호텔에서 총격전을 벌였던 그의 얼굴이 낡은 사진같이 희미한 영상을 남기며 스쳤다. 저격병이 쏜 총탄에 맞아 구겨지고 일그러졌던 그자. 나는 눈 속으로 들어가듯 그를 지켜봤다. 그는 바이올린을 켜는 소녀같이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중국계 마피아디요. 박 동지와는 막역한 사이구요, 박 동지는 그를 통해 이곳에서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왔으니 끼니. 심지어 플루토늄을 반입하는 문제도 그 동안 그가 수행했디요. 그러다 보니 박동지와 그는 모든 것을 말하고 신뢰
“백합.”그는 목소리를 낮추고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백합?”나 역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반복했다.“알렉세이디요.”“예? 알렉세이가?”나는 순간적으로 알렉세이의 농장에서 나오던 날 김부총영사가 승용차 속에서 백합이 미스터리 인물이라며 내게 한 말을 떠올렸다.“그렇디요. 대신 그에게서 미국 측의 핵협상 고급 정보를 사전에 북조선 측에 넘기겠다는 약속을 받았디요. 놀랄 만한 사실이디요?”그의 말은 점점 알 수 없는 미궁으로 나를 빠져들게 했다. CIA의 현지 프락치로 알려진 알렉세이가 북한과 핵폭탄 기폭 장치인 휴즈박스 거래를 극비리에
“보위부 새끼 말이야요. 그 새끼가 내 주머니를 알게 된거야요. 그새끼는 그날부터 나를 협박하기 시작했디요. 지금까지 모아 놓은 돈을 모조리 자신에게 주디 않으면 북조선으로 송환시키겠다는 것이었시요. 그러고도 모자라서리 앞으로 돈 버는 거이 절반을 지게 상납하라는 것이었시요. 나는 하는 수 없이 그 돈을 넘겨주고 벌목공 탈출자들 색출 작업에 동원된 거디요.”그의 말은 스폰지 같이 나를 빨아들였다.“김 채린 동지를 만난 것도 그때쯤 이었디요. 우리가 탈출 한 뒤 우수리스크 인근에 숨어 있을 때 한 선교사를 만났고 그로부터 김 동지를
“박 동지는 우리에게 너무나 고마운 사람이었는디.”그는 목소리가 잠기는 것을 억지로 피하느라 헛기침을 했다.“박 동지는 나와 아주 절친한 사이였디요. 고향이 청진으로 내고향 원산과는 다르지만 동생 같은 사람이었디요. 당성도 좋고 김일성대학도 직계 후배거든요. 나와 비슷한 곳이 많았디요. 김일성대학을 나온 뒤 곧바로 해외 공관으로 나온 것도 같고…….”“김진식 말입니까?”“알고 있구만요. 박 인석은 가명이고 본명은 선생님 말씀대로 김진식 이디요. 경주 김가로 나와 본향이 같디요. 그래도 우리는 하도 박인석으로 불러서리 그것이 핀하디요
움막 안은 보잘것없는 작은 공간을 가운데 두고 나무판자와 얇은 거적, 그리고 풀 무더기 등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폐 따차가 확실했다. 한 평 남짓한 가운데 공간에는 희미한 기름불이 시커먼 꼬리를 날리며 까무락 거렸고 그럴 때마다 우리의 그림자가 괴물같이 일렁거렸다. 가재도구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한 모퉁이에 일그러진 양은솥과 약간의 깡통, 그리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흉한 몰골로 버티고 앉은 양동이가 고작이었다. 옷을 걸어 둘 만한 곳도 또 이부자리도 보이지 않았다. 흉하게 내려앉은 각목들과 하늘이 간간이 올려다 보이는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짙은 어둠은 일행이 산 능선에 다다를 즈음에야 겨우 약간씩 벗겨지며 구름 속에 숨어 있던 희미한 달빛이 나뭇잎 사이로 새어들었다. 내가 그들을 따라 40분 정도를 올랐을 때 내리막길이 나타나며 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별들이 머리위로 쏟아졌다. 어린 시절 들마루에 누워 올려다보았던 그 하늘이었다.“아직 많이 가야 합니까?”나는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다왔시요, 힘드시디요. 그럴 거야요. 우리도 한 번씩 오르내리기가 수월치 않으니 끼니.”앞서가던 사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다른
“말끝마다 위대한 영도자를 찾던 그가 북조선 체제를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나섰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그곳 체제에 불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북조선 체제가 폐쇄성을 벗어나지 않는 한 멸망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는 것은 엄청난 변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그가 짧은 시간에 그렇게 변한 이유가 뭘까요?”“사실 짧은 시간에 변한 것은 아닙니다. 오랜 기간 이곳 생활을 통해 변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겁니다. 갑자기 변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송환을 앞뒀기 때문일 겁니다.”“송환?”“그는
나는 한참 동안 망설이다. 오후 3시가 지난 시각에야 몸을 자리에서 일으켰다. 물론 영사관 직원에게 제시간에 출국이 어렵다는 말을 전했다. 다녀와야 할 곳이 있다고만 했다.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된다는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녀는 수차 내게 빨리 움직여 줄 것을 주문했다. 결국 따냐가 자신을 인질로 하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가 지켜보는 가운데 권총을 다시 챙긴 뒤 따냐를 따라 나섰다. 따냐가 나를 데려간 곳은 호텔에서 5시간 이상 떨어진 숲속의 어둠이었다. 눈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승용차의 헤드라이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만날 사람도 또 만날 이유도 없었다. 도리어 이런 말을 내뱉고 있는 따냐가 말없이 이 방을 나가 주었으면 차라리 좋을 성싶었다.“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끝나지 않았다니요. 채린이 떠나갔는데 아직 무엇이 더 남았다는 말입니까? 내게는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순간적으로 목이 잠겼다.“돌아가세요. 더 이상 할 말도 없습니다. 당신과는 …….”나는 의자에 더욱 깊이 몸을 묻고 눈을 내리 깔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장 기자님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해하시기 힘들겠지만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아시게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나 선배가 왔거나 아침부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야로슬라브가 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똑” “똑” “똑”나는 귀찮았지만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었다.그곳에는 뜻 밖에도 따냐가 서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는 순간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눈가에는 촉촉한 이슬이 맺혀 있었다. 그녀는 보랏빛 스카프를 쓰고 미색 버버리 코트를 정갈하게 걸쳤으며 허리는 잘록하게 묶고 있었다. 얼굴은 고된 노동의 끝만큼이나 수척했다. 세상살이를 포기한 사람처럼
[16] 탈북자6월 30일 나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파라다이스 호텔 앞에 잔디공원의 흰 벤치에 앉아 있었다. 잿빛 날씨가 을씨년스러워 옷깃을 세웠다.바다에서 불어오는 날카로운 바람이 멍든 하늘을 산산조각 낸 뒤 땅위에 흩뿌렸다. 그럴 때 마다 잔디공원을 뒤덮고 있던 무성한 풀들이 몸서리치며 짠바람을 피하느라 아우성을 질렀다.이제 지구의 모든 생명이 종말을 고하고 태양은 사라져 영원히 떠오르지 않을 것 같았다. 제4세계를 기획한 신이 온통 지구의 모든 것을 자신의 마지막 정열로 불살라 버린 뒤 다시는 이 땅에 생명의 씨앗을 뿌리지 않
‘채린아! 이제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됐나 봐. 그토록 사랑하고 그렇게 그리워했던 당신인데. 이제 여기서 헤어져야 하나 봐.채린아. 당신을 고향동산에 포근히 잠들게 할까도 생각했어. 또 아들과 함께 손잡고 셋이서 오르던 계룡산 자락에 뿌려줄까도 생각했어. 산새들과 산토끼 그리고 당신이 좋아하는 제비꽃의 향기를 맡으며 눈감을 수 있도록 할까도 생각했어.하지만 당신이 꿈에도 그리던 대지. 그 하늘아래 당신을 뿌리기로 했어. 못다 이룬 푸른 꿈을 저 생에서라도 이루도록 말이야. 채린아. 오늘 당신을 놓아주는 것은 내게서 멀리하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