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나 선배가 왔거나 아침부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야로슬라브가 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 “” “

나는 귀찮았지만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뜻 밖에도 따냐가 서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는 순간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눈가에는 촉촉한 이슬이 맺혀 있었다. 그녀는 보랏빛 스카프를 쓰고 미색 버버리 코트를 정갈하게 걸쳤으며 허리는 잘록하게 묶고 있었다. 얼굴은 고된 노동의 끝만큼이나 수척했다. 세상살이를 포기한 사람처럼 체념한 표정으로 그렇게 서 있었다. 산뜻하게 달려 올라간 히프와 경쾌한 발걸음, 좁지만 고상함이 느껴졌던 어깨는 무거운 등짐이 지워진 소처럼 축 늘어졌다.

나는 말없이 방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돌아섰다. 할 말이 없었다. 목까지 차올랐던 그녀에 대한 분노마저 사라진 뒤였다. 그녀를 만나면 언젠가는 앙갚음을 하겠노라고 다짐했던 앙금도, 격했던 감정도, 또 치가 떨리도록 끓었던 배신감도 이제는 허공에 날려 보낸 뒤였다. 화장터의 거센 불길에 채린의 육신이 불타는 동안 나는 내 마음 속에 응어리졌던 분노가 함께 정제됐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대하고 있음에도 평안했다.

그녀에게 소파에 앉을 것을 권하고 딱딱한 의자에 몸을 의지했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우리는 그렇게 말없이 한참 동안 멀뚱하게 앉아 있었다. 할 말을 잊은 연인들처럼 각기 다른 사물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무슨 말을 끄집어내야 할지를 생각했다. 두 사람 사이에 서먹한 분위기가 벽처럼 가로놓였다. 그러다 먼저 말을 어렵게 내민 것은 따냐였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날 이후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편한 마음으로 생활해 본 적이 없습니다. 밤마다 김 선생님의 꿈을 꾸었고, 혼자 있을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장 기자님께는 더욱 송구스러웠고요. 다만…….”

그녀는 북받치는 감정을 속으로 억제하고 있었다.

왜 나를 피했소?”

나는 말을 잘랐다.

“........”

그녀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러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뒤 다시 말문을 열었다.

박 인석씨와 통화를 했습니다.”

박 인석? 그는 죽었는데?”

알고 있어요.....그가 피살되기 직전에.”

그녀는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하며 북받치는 감정을 자제하느라 입술을 자잘하게 떨었다. 그러다 유리창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녀는 단단히 각오를 한 사람처럼 입을 야무지게 물며 말을 계속했다.

지난 22일 밤에.”

“22일 밤?”

장 기자님이 총영사관을 다녀온 뒤 김 선생님이 북한에 납치된 것 같다고 말한 날 …….”

어떻게.”

제가 먼저 전화를 걸었습니다. 김 선생님의 납치가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그래서요?”

아니 먼저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소개시켜 드릴 사람도 있고…….”

어디를 가자는 겁니까? 나도 납치하려고요?”

가보시면 알 겁니다. 그동안의 이야기는 가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당신을 어떻게 믿고 또 누굴 만나게 해준다는 겁니까?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난 상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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