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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마지막회]
탈북자 [마지막회]
  • 이광희
  • 승인 2019.06.10 09:1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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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였다. 알렉세이가 올라간 2층 방에서 전화벨이 탁상시계 같이 요란하게 울렸다.
  나는 벨소리에 놀라 풀 먹인 삼베처럼 빳빳하게 정신을 가다듬었다.
  벨소리가 멎자 알렉세이의 목소리가 총격전을 벌이는 비디오 효과음과 함께 뒤섞여 문틈을 비집고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그의 목소리는 의도적으로 목젖을 누르고 조심스럽게 내뱉는 그런 말투였다.
  나는 2층을 힐끗거리며 거실에 있던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알렉세이가 생소한 목소리의 사내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뭐야? 김 채린을 드뇸에 알세니에프 박물관 앞으로 보내겠다고?”
  “예. 낮12시 지나서. 대신 더 이상 찾지 마십시오. 드뇸.”
  “왜?”
  “묻지 마십시오. 약속을 지켜주십시요.”
  “나는 미스터 쟝이 내 밑에서 일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네. 책임질 사람이 필요해.”
수화기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미스터 쟝과의 통화였다.
  ‘채린을 알세니에프 박물관 앞으로 보내겠다고? 점심때.’
  순간 극동군 사령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서 있던 알세니에프 박물관이 스쳤다. 박물관 시계탑이 정오를 알림과 동시에 그곳에 버려질 그녀의 모습이 영상처럼 눈앞을 미끄러져갔다. 그곳에 서 있을 채린의 초췌한 얼굴이 다가왔다.
  비디오 효과음의 볼륨이 더욱 높아지며 알렉세이의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때문에 나는 더 이상 그의 말을 정확하게 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소리는 악령을 부르는 소리임에 틀림이 없었다. 양지쪽에 떨어진 새의 주검을 파먹으며 고물거리는 구더기들이 지르는 아우성 같은 소리였다. 소름이 오싹 끼쳤다.     
  나는 권총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알렉세이의 목소리가 가라앉은 2층 계단을 따라 발소리를 죽이며 올라갔다.
  방 안에서는 여전히 폭음과 총소리가 뒤섞인 비디오 효과음 사이로 전화를 받는 알렉세이의 목소리가 간간이 새어 나왔다.
  “알았어, 알았다니까. 약속을 지킬 테니 돌려보내....”
  나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잠시 조용했다. 곧이어 어딘가로 전화 거는 소리가 들렸고 알렉세이의 말소리가 다시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나요. 백합,”
  “…….”
  “노란 병아리를 야간학교 보내는 것은 시간문제요,”
  “…….”
  “이번에는 제대로 걸려들었어.”
  “…….”
  “쟝이란 놈이 순진하게 노란병아리를 보내겠데.”
  “…….”
  “곧바로 조치를 취할 거요.”
  피가 솟구쳤다. 심장이 터질 듯이 요동쳤다. 숨을 고를 수 없었다. 온몸이 가랑잎처럼 떨렸다. 손이 더욱 미끈거렸다. 식은땀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방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가 전화를 받고 있던 알렉세이의 머리를 향해 권총을 들이대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자 그는 생각치도 않았던 나의 침입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한 발 성큼 물러섰다.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수화기를 다급하게 내려놓았다.
  “왜 이러는.....?”
  “몰라서 물어?”
  짧게 말을 잘랐다.
  “오해야. 오해. 내가 왜?”
  그는 거물답게 말투를 바로잡으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 위기를 모면하려는 그의 눈빛이 번득였다.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나를 자극해서는 안 된다는 주문을 스스로에게 하고 있었다.
침착성을 되찾기 위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내 눈빛이 심상찮다고 생각했든지 가까이 있던 책상 밑을 곁눈질했다. 그곳에 권총을 숨겨 놓은 것이 확실했다. 한 치라도 허점을 보인다면 그는 잽싸게 권총을 뽑아들 심산이었다. 
  나는 계획한 대로 방아쇠에 힘을 주었다. 그의 백호를 향해 방아쇠를 힘껏 당기라는 숨진 알리에크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그의 머리를 두 조각으로 만들고 싶다는 강한 충동이 나를 난간에서 떠밀었다. 
그 순간이었다.  알렉세이가 책상 밑으로 손을 들이밀었다.
나는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방아쇠를 힘껏 당겼다.
  “탕”.
  알렉세이는 전화기를 떨구고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나를 노려보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총구를 벗어난 실탄이 머리에 구멍을 내며 치솟았다.
  비디오 속에서는 백호에 연필 굵기의 구멍이 뚫린 사내가 쓰러져 있었다. 
  나는 돌아서며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던 알렉세이의 턱을 권총 손잡이로 후려갈겼다.
그제야 그는 두 눈을 내리깔며 썩은 고목이 쓰러지듯 뻣뻣하게 굳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널 부러졌다.
나는 비디오 볼륨을 더욱 높였다. 그러자 효과음이 거세게 스피커를 진동시키며 별장 벽면을 흔들었다.
  살쾡이 울음 같은 바람소리가 2층에서 흘러나오는 비디오 효과음을 휘감으며 숲 속으로 사라져 갔다.
  

  알렉세이의 별장 2층 방에서는 낡은 텔레타이프가 다급하게 자판을 두드리며 전문을 받고 있었다.

  ‘지령-1462

  발신: 학교
  수신: 백합
  내용: 협조 요청. ‘드뇸’을 ‘희망’으로 재추진 바람. 
  추신: 쥐새끼 8마리 남쪽나라로 도주했다는 첩보가 있음. 확인 바람.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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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독자 2019-07-30 13:14:43
와우, 정말 재미있습니다. 영화로 만들면 대박 날 듯 합니다. 근데 재목을 좀 더 멋지게 하면 좋을 듯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