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158]
탈북자 [158]
  • 이광희
  • 승인 2019.05.24 09: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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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짜별로 꼼꼼하게 메모한 노트를 탁자 위에 던졌다. 난마같이 얽힌 사건에 대한 실마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살인자들, 그리고 그들에 의해 죽어 간 사람들, 그들의 얼굴이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렸다. 채린의 얼굴이 더욱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자 가슴 속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던 배신감이 혈관을 타고 올라 정수리에 엉겼다. 그것들은 나에게 더욱 흥분할 것을 종용하며 중추 신경을 자극했다. 신경세포 하나 하나를 물고 내 몸이 충분한 반응을 보일 때까지 나를 괴롭힐 심산이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원형탈모증 같이 머리카락을 한 웅쿰씩 뽑으며 위로 솟구칠 것 같았다. 나는 막 등산을 끝낸 사람처럼 헐떡거리며 길게 숨을 내몰았다.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알렉세이에게 돌려주려던 권총을 다시 뽑아 들었다. 숨진 알리에크의 권총이었다. 싸늘한 느낌이 손끝에 만져졌다. 나는 그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심정으로 구릿빛 실탄을 한 발 장전시켰다.

알렉세이가 채린을....나쁜 새끼....어떻게 내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

나는 혼잣말을 했다.

알렉세이가 드뇸을 추진했다면 그가 왜 내게 호의를 베풀었을까. 대리전쟁을 위해. 중국계를 몰아내는데 나를 끌어들임으로써 자신들과의 직접적인 대결 국면을 피하기 위해서, 또 내손으로 채린을 찾도록 하기 위해서? 알렉세이가 북한과 핵폭탄의 휴즈박스 거래를 추진한 사실이 미국 CIA에 넘겨진다면 그는 끝장이야. 게다가 미국 측의 북. 미핵협상 관련 정보를 빼내 북한 측에 넘겨준 사실이 알려지면 그는 미국 측의 보복에 살아남지 못할 거야.’

나는 눈두덩이에 힘을 주며 또 하나의 실탄을 장전시켰다. 실탄을 장전하면서 비수를 던지는 기분으로 알렉세이의 가슴에 총탄을 꽂겠다고 다짐했다. 순간의 틈도 주지 않고 그의 심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 아니 그가 채린을 살해했듯이 나도 극도의 잔인성으로 그를 살해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먼저 왼쪽 다리의 허벅지를 향해 실탄을 날린 뒤 고통을 호소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면 오른쪽 무릎을 쏴 버리겠어. 그러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겠지. 두 손을 모아 살려 달라고 애원을 하겠지. 채린을 살해하라고 시킨 것은 자신이 아니라고 둘러댈지도 몰라. 그것은 단순히 실수였다고 말할 수도 있어. 또 나에게 채린의 주검에 대한 보상으로 상당액을 주겠다고 제의할지도, 또 나를 회유하려 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동안 나는 그의 왼팔을 날려 버리고 곧이어 다른 팔마저 날려 버릴 거야. 끝으로 마지막 실탄이 든 총을 그의 눈앞에까지 들이대고 나를 빤히 올려다보는 회갈색 눈을 향해 방아쇠를 힘껏 당길거야.’

팔이 더욱 심하게 떨렸다.

그렇다면 알렉세이가 알리에크와 야로슬라브를 왜 내게 보냈을까. 나를 감시하기 위해.......또 알리에크는 왜 죽도록 내버려두었을까. 중국계가 호텔로 기습한다는 것을 나 선배는 알렉세이에게 들었다고 했는데. 그들이 왜 직접 알리에크에게 전하지 않았을까. 혹시 .....’

나는 알렉세이의 농장에서 다리를 절룩거리던 사내를 떠올렸다.

맞다. 그가 내총에 맞은 괴한일 수도 있다. 별장에서 내 눈을 힐끔 흘겨본 뒤 곧바로 돌아섰던 놈. 그들이 알리에크를 살해했을 거야. 알리에크의 마약 상복을 알고 있던 알렉세이가 KGB, CIA, 그리고 미국 마약청 DEA 요원으로부터 러시아계 마피아의 마약 거래 사실이 의심을 받기 시작하자 늘 마약에 젖어 사는 그를 없앴을 거야. 따냐의 집에서 돌아오던 날 우리를 뒤쫓은 것도 알렉세이의 부하들이었으며 그래서 총탄이 우리를 빗겨 간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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