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탈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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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파라다이스 호텔 앞에 잔디공원의 흰 벤치에 앉아 있었다. 잿빛 날씨가 을씨년스러워 옷깃을 세웠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날카로운 바람이 멍든 하늘을 산산조각 낸 뒤 땅위에 흩뿌렸다. 그럴 때 마다 잔디공원을 뒤덮고 있던 무성한 풀들이 몸서리치며 짠바람을 피하느라 아우성을 질렀다.

이제 지구의 모든 생명이 종말을 고하고 태양은 사라져 영원히 떠오르지 않을 것 같았다. 4세계를 기획한 신이 온통 지구의 모든 것을 자신의 마지막 정열로 불살라 버린 뒤 다시는 이 땅에 생명의 씨앗을 뿌리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모를 만큼 혼재된 세상. 시끄럽고 어지러운 정신만 온전하게 인식되는 카오스의 땅. 자연의 섭리를 거역한 돌연변이들만이 독버섯처럼 살아남는 세태, 이런 것들을 신은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어 제 4의세계를 기획했을 것이다. 불로써 심판하리라던 성경의 예언이 오늘에 와서 실현 될 것 같았다. 화산들이 신의 명령에 따라 일제히 미친개처럼 불을 뿜고, 집집마다 죽음의 재를 쌓아둔 인간들은 자신들의 타락 대가로 그 불세례를 받을 것이다.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를 태우며 연기 속으로 사라지고 하늘은 온통 잿빛 죽음으로 뒤덮일 것이다. 바람이 불때마다 사람들의 재가 풀썩 풀썩 죽은 대지에 뿌려지고, 그러면 대지는 사순절의 성당 종소리같이 요란하게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괴성을 토하리라. 무너진 하늘, 무너진 땅, 무너진 사람들. 이제 새 생명이 태어나는 세상은 다시는 만들어 지지 않으리라 푸념했다. 외줄기 눈물이 볼을 적시며 흘러 내렸다.

채린이 사라진 공간, 그 공허함이 이토록 모질게 가슴을 헤집는지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내 곁에서 멀어져 갔는데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떠나간 것 같은 외로움과 허전함을 가슴 가득히 느끼고 있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바람이 머리를 헝클며 스쳐갔다. 멀리 하늘을 가로지르는 바람이 비구름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나는 순간 악질적이고 난폭한 행동을 취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발끝에 굴러다니는 빈병으로 벤치를 내리치고 싶었다. 벤치를 마구 부수고 싶었다. 구두의 뒤축이 빠질 정도로 깔판을 산산이 부순 뒤 그 조각들을 보이지 않는 곳까지 던져 버리고 싶었다. 그러다 사람이 몰려오면 그들 가운데 나보다 나약해 보이는 사내를 골라 그를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었다. 그러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하지만 공원은 텅 비어 있었다.

공원주변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말없는 바람만 길게 자란 들풀들을 휘몰았다. 녹슨 가로등에 너들 하게 붙은 광고지 조각이 바스락 거렸다.

나는 호텔로 돌아와 짐을 챙겼다. 시계가 오전 1130분을 가리켰다.

대한항공 OZ320기편. 좌석번호 32A. 출발시간 오후 630.”

나는 비행기 티켓을 만지작거리며 소파에 앉았다.

이제 7시간의 비행기 탑승 시각을 기다리는 것 밖에 내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47장의 연극이 끝나고 난 뒤의 공허함만 가득 고였다.

호텔에 배달된 현지 신문은 1면 하단에 채린의 피사체 발견을 보도하고 있었다.

신문을 구석진 곳으로 던졌다. 눈물이 핑돌았다. 채린의 생각이 다시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들과 숨 가쁘게 돌아갈 일상, 그리고 눈덩이같이 불어나 있을 즐겁지 않은 일감을 애써 생각했다. 또 우수리스크에서 중국계 마피아들에게 당했던 굴욕을 이를 물고 되씹었다. 나홋카에서 만났던 사내. 아파트. 루스 카야 이즈바…….

하지만 그런 것들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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