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화를 끊고 다시 수첩을 뒤졌다. 하지만 전화를 걸만한 곳이 없었다. 나는 이마에 손을 얹고 앉아 있었다.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뒤엉킨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었다. 머릿속은 무너진 건물더미에 깔린 철근같이 뒤엉켜 좀 채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귀가 따가울 만큼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린 것은 시계가 오전 11시20분을 막 지날 때였다. 나는 소파에 앉아 졸고 있었고, 야로슬라브는 침대에 누워 총구를 보고 있었다. 급히 수화기를 들었다.“장 기자님, 안녕하세요.”많이 듣던 목소리에 정갈한 서울 말투가
[12] 약속 6월25일 알렉세이가 보낸 야로슬라브는 아침나절 영사관 직원이 돌아가기 직전에 호텔로 찾아왔다.후줄근한 청바지를 걸치고 나타난 그는 덥수룩한 얼굴과는 달리 당찬 맛이 돋보였다. 주검이 된 알리에크가 유순하고 황소같았다면 야로슬라브는 약삭빠른 살쾡이처럼 보였다.인사로 내뱉는 말투도 그렇지만 흑갈색 눈동자가 유달리 긴 눈썹사이를 오가는 것도 기민했다. 눈 끝은 치켜 올라 날카로움이 번득였다. 굵은 통뼈의 팔과 다부진 체구, 팔뚝에 새겨진 흑장미 문신........나는 그를 보면서 어떤 족속이든 첫인상이 풍겨주는 이미지가
“말 좀 해보세요. 나를 믿지 못해서?”“그런 것은 아닙니다. 업무상 말 못할 일이 있어서......”“말 못할 사정이 뭐가 있습니까. 그렇게 곤란하시다면 그만두셔야지요.”나는 쓴맛을 다시며 담배 연기를 들이켰다.방 안에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나는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 말문을 열도록 하는 길이 그 길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말하기 곤란한 부분이라…….”그제야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무슨 이야기든 들려주지 않으면 자신의 할 일을 다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알
어둠 속에 모습을 드러낸 호텔은 길게 몸을 눕힌 공용처럼 보였다. 대부분의 객실에 불이 꺼져 있었지만 가로등 불빛에 호텔 전체의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나 선배는 영사관 직원과 함께 내가 객실로 오르는 것을 지켜본 뒤 카운터 쪽으로 다가갔다.가방을 들고 앞서가던 영사관 직원이 걸음을 멈춘 곳은 객실번호 3425호. 3층 425호실이었다.뒤따라온 선배는 내가 객실에 짐을 풀어놓자 잠시 방을 둘러본 뒤 영사관 직원만을 남겨두고 곧바로 돌아가 버렸다. 오늘 일이 왜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하려질 않았다. 다만 알렉세이가 야로슬라브라는 사
객실 문에 난 실탄구멍을 통해 형광등 불빛이 빤히 속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나는 알리에크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고 실내등 스위치를 다시 올렸다. 그러자 불빛아래 누워있는 알리에크의 모습은 끔직했다. 실탄이 뚫고 지나간 머리 왼쪽 뒷부분은 속을 파낸 수박같았다. 온통 뒤통수가 골수와 핏덩이로 뒤범벅이 된 채였다. 방 구석구석마다 그의 골수와 피가 얼룩져 있었다. 핏자국은 나무판자 속으로 파고들어가 새 삶을 얻은 검붉은 버섯처럼 호텔 바닥에 엉겨 있었다.알리에크는 축축하게 젖은 눈동자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동자는
순간 세 발의 실탄이 객실 문을 뚫고 들어와 멍청하게 서 있던 알리에크의 머리와 가슴에 차례로 박혔다. 골수가 핏덩이와 함께 허공으로 비산했다. 그것들은 창문과 벽에 먹물을 뿌린 듯 순식간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육중하고 단단했던 그의 몸은 어느새 바람이 빠진 애드벌룬같이 형편없는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그들이 쏜 총소리를 감지한 것은 그때쯤이었다. 총성에 멍든 울림만 귓바퀴에 고여 있었다. 알리에크가 고목처럼 쓰러지는 순간 나도 몰래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나는 악을 쓰며 문에 새겨진 실탄구멍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그러자 분노를
“나 선배가 왜 짐을 챙기라고 말하는 걸까. 그가 그토록 호들갑을 떨 사람이 아닌데. 내가 모르는 일이 또 생긴 걸까.”내가 가방을 거의 챙겼을 때쯤 호텔복도 쪽에서 몰려오는 둔탁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실내등을 껐다. 그 소리는 낡은 카펫을 사정없이 밟으며 성난 들소같이 우리가 머물고 있던 룸 쪽으로 다급하게 다가왔다. 발소리로 미루어 서너 명은 될 것 같았다.나는 침대 밑에 묻어두었던 토카레프 38구경 권총을 찾아들었다. 권총에는 실탄이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자물쇠를 풀었다. 발자국소리가 더욱 가깝게 들려왔다. 나는 재빨리
“채린이 북한 공작원들에게 납치됐을 가능성이 크답니다.” “예? 북조선측에 …….”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는 눈치였다. 내가 충분히 그녀를 관찰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내 말을 듣는 순간 입술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때까지 얼굴에 감돌았던 연분홍빛 아지랑이가 싹 가셔버렸다. 목소리마저 파르르 떨렸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그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녀는 팽팽히 당겨져 실핏줄이 들여다보이는 뺨에서 눈물을 닦았다. 그녀는 진실로 채린의 납치 가능성을 믿고 있었으며 또 슬퍼하고 있었다. 연신 훌쩍거리며 고개를 숙이고 나를 보지 못
“우리가 파악하고 있기로는 북한 공작원이야. 묘향산이란 암호명으로 이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자와 동일 인물로 추정되는 놈일세. 물론 추정이지만, 잔인한 놈으로 첩보 계에서는 알려진 놈이야.” 나는 천장이 노랗게 퇴색되는 것을 느끼며 몸을 더욱 깊이 소파에 묻었다.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목구멍에서 간질거리던 궁금증도 사라져 버렸다. 실타래같이 뒤엉긴 머릿속에서는 ‘공작원’이란 단어와 ‘납치’ ‘미스터 쟝’ ‘박’같은 단어들만이 나뒹굴었다. 내가 다시정신을 차리고 나 선배의 말을 또록또록하게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져다
“.......”“북한 측이 노골적으로 이런 공문을 보내온 것을 보면 김 선생도 이런 차원에서 납치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야.”“그렇다면 북한 측에 의해......”“면목이 없네. 그럴 가능성이 가장 많다는 것이지.”나는 긴 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후두부를 둔탁한 물체에 얻어맞은 것 같았다.눈을 지그시 감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몽롱한 넋이 아른거렸다. 나 선배는 내가 받은 충격을 스스로 흡수 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침착성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내게 던진 충격이 종이위에 떨어진 물방울같이 스며든 뒤
나는 계속 그 점을 걱정하고 있었다. 세르게이에게 보복 가능성을 듣고 난 뒤부터 솔직히 나는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잠자리에 들면 종종 천 길 낭떠러지를 헤매듯 침대를 기어 다니다 새벽녘에야 겨우 눈을 붙이곤 했다. 매일같이 술을 마신 뒤에야 잠을 청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채린을 찾아 나선 것이 도리어 그들을 자극하지나 않을까하는 우려에 괴로워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채린을 찾아나서는 일을 도중에 그만두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것은 나약한 생각이라고 치부하기보다 채린을 사경으로 몰아넣을 수 없다는 절박한
전화를 끊었다. 빅또르 김에게도 전화를 걸었지만 그 역시 빈손이었다. 원점으로 돌아갔다. 나는 주소록을 뒤져 나홋카에 있는 박 인석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에게 나홋카의 분위기도 알아볼 겸, 또 채린에 대한 소식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였다.하지만 박 부장은 자리에 없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출장이 의외로 길어져 다음 주쯤에야 온다는 것이 그곳 여직원의 설명이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다시 룸으로 돌아왔다.알리에크는 샤워를 끝내고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유달리 큰 배가 볼품없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나는 알렉세이에게 전화를 걸
[11] 깨진 커피 잔6월24일 블라디보스토크 호텔에서 눈을 뜬 것은 낮 12시가 조금 지나서였다.나는 심한 갈증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빈 병이 텅텅거리는 소리를 내며 머릿속을 굴러 다녔다. 뒷골이 당겨왔다. 피로가 가시지 않아 몸이 무거웠다.나는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를 들이켰다. 하지만 취기가 가시지 않았다.알리에크는 그 때까지 맞은편 침대에서 코를 골며 곤하게 자고 있었다. 따냐는 보이지 않았다.나는 침대 난간에 걸터앉아 까칠한 턱수염을 만지작거렸다.‘어디로 데려갔을까. 미스터 쟝은 왜 채린을 데려갔을까. 알리에크의 말
채린이 머물렀던 아파트는 문이 굳게 잠겨있었다. 문을 열고 관리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방안이 어수선했다. 간단한 가재도구들이 여기저기 버려져 있었고 옷가지들은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었다. 대부분 그의 옷가지들이었다. 다급하게 빠져나간 흔적이 발자국같이 뚜렷이 남아 있었다. 주방에는 한국산 컵라면과 과자봉지, 일회용 주사기 등이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아파트는 방 두 칸과 주방이 전부였다. 안방쯤으로 보이는 곳의 문을 열자 러시아산 특유의 메케한 향수냄새가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벽에는 여자들의 요염한 나체 사진이 너절하게
덮어두었던 낡은 신문을 들추어 보기도 했고,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책자를 들추기도 했다. 잠시만이라도 자신을 더 귀찮게 군다면 관리실의 문을 안으로 걸어 잠글 기세였다. “그렇다면 미스터 쟝의 방을 잠시만 보면 안 되겠습니까?“그것은 곤란하지. 주인이 없는 집을 어떻게 보여 주누”그는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다. 심상찮다는 생각이 스쳤다. 쟝이 관리인을 매수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주머니를 뒤져 이곳에서는 보기 드문 10불짜리 지폐를 건네주었다. 그러자 관리인은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며 연신 나를 아래위로 훑어 봤다. 자신에게
그는 손을 떨며 주소를 쓴 뒤 손가락을 움켜쥐고 탁자에 엎드렸다.나는 주소를 집어 들고 그의 등을 다독거렸다. 그는 거친 숨을 토하며 탁자에 엎드린 채 흐느꼈다. 몸에서는 눅눅한 땀 냄새가 번져왔다.나는 룸 쪽으로 몸을 돌리는척하다 이내 돌아서며 권총의 손잡이로 그의 후두부를 힘껏 후려 갈겼다.그는 비명도 토하지 못하고 문어같이 그 자리에 허물어지며 탁자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선홍빛으로 물든 흰 탁자보가 함께 미끄러져 그의 얼굴을 덮었다.나는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며 루스 카야 이즈바를 나왔다. 알리에크는 벤치에 앉아있다 내가
나는 권총을 들이댄 쿠션을 입에 다시 물렸다. 눈물이 지르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그제야 그는 더 이상 고통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쿠션을 입에 문 상태로 살려달라고 애원했다.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채린이 어디에 있는지 말하지 않는다면 더 큰 고통을 가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에게 눈빛으로 말했다.그는 손가락을 움켜쥔 채 더욱 심하게 떨었다.나는 그에게 다시 손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라고 말했다.그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재빨리 손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옆에 놓인 재떨이가 자잘하게 달그락 거리는 소리를 내며 떨렸다. 탁자보가 어느
그는 또 내가 이곳에 올 줄 알았으며 그런 사실은 이곳 조직원들이 다 알고 있는 일이라고 협박조로 말했다. 도리어 내가 조직원들에게 적발된다면 자신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해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그는 손톱으로 탁자를 긁으며 자신이 빠져나갈 좁은 틈을 시종 찾고 있었다. 나는 규칙적으로 탁자를 긁고 있는 그의 손가락을 내려다 봤다. 손목에 새겨진 까만 독거미 문신이 곰실거렸다.“쥐새끼 같은 놈.”순간 나는 그의 관자놀이를 겨누고 있던 권총의 손잡이 끝부분으로 사내의 왼쪽 새끼손가락 끝마디를 내리 찍었다.그러자 우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조용히 물었다.“어디 있나.”“........”그는 여전히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지 않았다. 다시 되물었다.“이 사람 어디 있나. 살고 싶으면 입을 열어.”“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그는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그러면서도 서서히 긴장을 늦췄다. 내 마음이 갈수록 조급해지는 것과는 달리 그는 도리어 느긋해지고 있었다. 바들바들 떨던 몸도 이제는 안정을 되찾았고 바이올린 줄같이 팽팽하게 긴장됐던 얼굴에는 여유가 감돌았다.나는 낮게 달린 전등으로 그의 얼굴을 비췄다.그의 눈빛을 읽기 위해서였다. 그는 채린의 사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