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린이 북한 공작원들에게 납치됐을 가능성이 크답니다.”
  “예? 북조선측에 …….”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는 눈치였다. 내가 충분히 그녀를 관찰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내 말을 듣는 순간 입술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때까지 얼굴에 감돌았던 연분홍빛 아지랑이가 싹 가셔버렸다. 목소리마저 파르르 떨렸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그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녀는 팽팽히 당겨져 실핏줄이 들여다보이는 뺨에서 눈물을 닦았다. 그녀는 진실로 채린의 납치 가능성을 믿고 있었으며 또 슬퍼하고 있었다. 연신 훌쩍거리며 고개를 숙이고 나를 보지 못했다.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긴 머리칼을 흘리며 룸을 나갔다.
  나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침대에 던졌다. 따냐가 앉아있던 자리에서  따뜻한 온기가 묻어났다.
  ‘채린이 나 선배의 말대로 납북됐다면 다시 찾을 길이 없는 걸까.’
   머릿속이 깨진 유리병같이 어수선했다.
  나는 미친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냉장고 속에 들어있던  싸늘한 보드카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목마른 사람처럼 병나발을 불었다. 속이 싸하게 술기운이 온몸으로 번졌다. 그것은 비이크 속의 곰팡이 포자같이 모세혈관 가닥을 타고 스며들었다. 헝클어진 머릿속이 알코올에 젖자 더욱 어지럽게 호텔이 흔들렸다. 채린의 납치라는 믿기지 않는 현실과 그녀를 찾아야 한다는 내 바람이 곤죽같이 뒤섞였다. 무엇 하나 논리를 세우고 있는 것이 없었다. 나는 아편 중독자처럼 침대에 드러누워 한 병의 보드카를 순식간에 바닥까지 비워버렸다.
  뒤늦게 돌아온 알리에크는 내가 술병을 찾을 때마다 육중한 몸으로 내 몸을 짓눌렀다. 내가 바락바락 고함을 지르면 그는 내 입을 손으로 막고 나를 시트 속으로 밀어 넣었다.
  몇 차례의 씨름이 계속되면서 나는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고 이내 몽롱한 알코올 특유의 독성에 젖어 들었다.
어둠이 눈자위에 휘감겼다.
  전화 벨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나는 방정맞은 벨소리에 놀라 눈을 떴지만 몸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솔직히 눈을 멀뚱멀뚱 뜨고 침대에 드러누워 있었다. 알리에크가 전화 받기를 기다렸다.
  전화벨이 짜증스럽게 울릴 때쯤에야 옆 침대에 누워있던 알리에크가 일어났다. 그는 눈을 감고 부스스 일어나 수화기를 든 뒤  이내 내게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딱정벌레처럼 침대 시트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나는 눈을 반쯤감고 자리에 누워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창밖은 이미 무거운 어둠에 눌려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새벽 1시쯤은 된 것 같았다. 창밖에서 번져온 가로등 불빛이 천장을 환히 비췄다.
  “여보세요.”
  취기가 입 안에 고스란히 고여 있었다. 혓바닥이 굳어 내생각대로 말을 뱉을 수가 없었다. 나는 몸을 옆으로 누이고 수화기를 귀가 눌릴 만큼 바짝 들이댔다.
  “장 기자 나야. 김이야. 아주 급한 일이니 지금 바로 짐을 챙기고 기다려. 내가 그곳으로 갈 테니까. 이유를 말할 시간이 없어. 빨리 짐을 챙겨.”
  나 선배였다. 그는 다급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거친 숨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고스란히 들려왔다.
  순간 이맛살이 팽팽히 당겨졌다. 온 몸을 거미줄같이 휘감고 있던 취기가 송두리째 사라졌다.
  “무슨 일입니까?”
  굳었던 혀가 감쪽같이 녹아 흐느적거렸다.
  “시간이 없어. 곧바로 짐을 챙기고 문을 굳게 잠그고 있어. 누가 문을 두드려도 절대 열어주어서는 안 돼. 명심해야 하네.”
  전화가 끊겼다. 윙하는 빈 소리만 귓속에 한참동안 고였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기억이 희미했다.
  그러다 나 선배의 다급한 목소리를 기억하고서는 용수철처럼 몸을 일으켰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허겁스럽게 방문을 잠그고 가방을 챙겼다. 비틀거리는 모습이 거울 속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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