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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99]
탈북자 [99]
  • 이광희
  • 승인 2018.12.05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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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선배가 왜 짐을 챙기라고 말하는 걸까. 그가 그토록 호들갑을 떨 사람이 아닌데. 내가 모르는 일이 또 생긴 걸까.”

내가 가방을 거의 챙겼을 때쯤 호텔복도 쪽에서 몰려오는 둔탁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실내등을 껐다. 그 소리는 낡은 카펫을 사정없이 밟으며 성난 들소같이 우리가 머물고 있던 룸 쪽으로 다급하게 다가왔다. 발소리로 미루어 서너 명은 될 것 같았다.

나는 침대 밑에 묻어두었던 토카레프 38구경 권총을 찾아들었다. 권총에는 실탄이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자물쇠를 풀었다.

발자국소리가 더욱 가깝게 들려왔다. 나는 재빨리 까치발을 들고 문 옆에 붙어있는 욕실 문턱에 몸을 숨겼다. 싸늘한 욕실 바닥의 냉기가 등골을 오싹하게 적시며 나를 긴장시켰다.

숨이 가빠왔다. 맥박이 다급하게 나를 벼랑으로 몰아세웠다. 권총을 쥔 손에 땀이 배어져 나왔다.

발자국 소리는 내 방 앞에 와서 약속을 한 듯이 멈춰 섰다. 다시 복도가 조용해졌다. 나는 애써 숨소리를 죽이고 침을 삼켰다. 머리카락 속에서 땀이 솟아올라 뒤통수를 타고 흘렀다. 번뜩이는 살기가 복도에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형광물질같이 어슴푸레한 빛을 발하며 어두운 복도의 허물어진 틈새를 비집고 각 방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딸깍.”

도어 록이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숨을 죽인 채 도어 록을 좌우로 돌리며 간이 열쇠로 귀지를 파듯 열쇠 구멍을 후비기도 했고 또 그곳을 통해 안을 엿보기도 했다. 문이 열리지 않자 그들은 끈질기게 자물쇠를 풀려고 달가닥거렸다.

끝내 문이 열리지 않자 그들 가운데 한 사내가 노크를 했다. 나는 숨을 죽이고 도어 록을 응시했다. 그러면서도 이들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냥 돌아가기를 기대했다. 사실 나는 그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이들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 그것은 내게 힘겨운 어려움을 안겨다 줄지도 몰라. 정당방위를 입증하기 위해 이곳 경찰에 드나들어야 하고 그렇게 된다면 총기 소지를 놓고 관계법을 적용시킬 거야......’

곧이어 그들은 신경질 적으로 다시 문을 두드렸다. 그들은 내게 문을 열어야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당당했다. 자신들은 내 룸에 들어올 수 있는 특권을 어떤 형태로든 받은 것처럼 행세하고 있었다. 한 밤중에 호텔에 들어와 문을 두드릴 정도로 대담한 자들이라면 어떤 일도 저지를 것이란 생각이 스쳤다.

내가 문 밖에 몰려온 이들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 잠기가 어두운 알리에크가 게으른 모습으로 가슴을 긁으며 문 쪽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그는 눈도 제대로 뜨지 않은 채였다. 부스스한 얼굴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안 돼.”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를 향해 외쳤다. 문 밖에 있던 자들을 의식한 탓에 크게 고함을 지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내 말을 듣지 못하고 계속해서 문 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걸어오면서도 졸고 있었다. 그의 발자국 소리가 문 밖에서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크게 들렸다.

순식간에 알리에크는 내가 몸을 숨기고 있던 욕실 앞까지 다가왔다. 그 때 문 밖에서 강한 금속성소리가 예민하게 문틈을 비집고 싸늘하게 들려왔다. 신경이 곤두섰고 머리카락이 쭈뼛거렸다.

엎드려.”

나는 다급하게 알리에크를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내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도리어 그는 어둠 속에 숨어있던 나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순간적으로 몸을 뒤로 젖히며 멍하게 나를 쳐다봤다. 그는 목장승 같이 문간에 버티고 서서 욕실 문턱에 숨어있던 나를 뚫어지게 보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나는 조바심이 났다. 문 밖에서 어떤 일이 준비되고 있는지 아무 것도 모른 채 문을 연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일 수도 있었다. 잠시도 머물 수가 없었다. 알리에크에게 몸을 던지기 위해 체중을 앞으로 옮기며 다시 소리쳤다.

엎드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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