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파악하고 있기로는 북한 공작원이야. 묘향산이란 암호명으로 이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자와 동일 인물로 추정되는 놈일세. 물론 추정이지만, 잔인한 놈으로 첩보 계에서는 알려진 놈이야.”
  나는 천장이 노랗게 퇴색되는 것을 느끼며 몸을 더욱 깊이 소파에 묻었다.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목구멍에서 간질거리던 궁금증도 사라져 버렸다. 실타래같이 뒤엉긴 머릿속에서는 ‘공작원’이란 단어와 ‘납치’ ‘미스터 쟝’ ‘박’같은 단어들만이 나뒹굴었다.
  내가 다시정신을 차리고 나 선배의 말을 또록또록하게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져다준 냉수를 길게 들이켜고 나서였다.
  “김 선생을 찾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네. 이것은 말해서는 안 될 사실이지만 두만강 유역에 파견 나와 있는 미 CIA와도 긴밀한 협조 체제를 유지하고 있어. 러시아 경찰도 적극 협조해 주고 있고......“
  러시아 경찰이라는 말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들의 나태한 행동에 채린의 생환을 기대하고 있는 영사관 측의 태도가 울화를 치밀게 했다.
  “러시아 경찰을 어떻게…….”
  “하지만 어쩌나 우리는 그들에게 정보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걸. 그게 이곳의 현실이야.”
  “..........”
  “아무튼 우리 영사관은 김 선생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찾을 걸세. 또 최선을 다해 그들의 행방을 알아보도록 하겠네. 믿어주게…….무슨 소식이 있으면 곧바로 호텔로 연락을 할 테니까.”
  나는 영사관을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충혈 된 눈을 통해 보이는 복도가 희미하게 어른거렸다. 나 선배는 허리에 팔을 감싸고 따라 나왔다.
  “장 기자 미안 하네. 하지만 희망을 잃지 말아야지, 꼭 찾을 수 있을 거야. 아직 속단하기에는 이르니까 꼭 찾도록 하겠네.”
  “.........”
  나는 호텔로 돌아온 뒤 방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공간의 무게가 나를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가슴이 공허함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풀썩 내려앉을 것 같았다. 입술이 바짝 말라왔다.
  ‘북한 측이 왜 채린을 납치했을까. 정말 납치된 걸까. 왜 벌목공 때문에? 그렇다면 왜 그녀가 내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보안 때문에? 내게 걸어온 전화가 도청 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렇게 했을까. 아니면 편지도 사전검열을 받기 때문에. 정말 북한 벌목공 탈출과 관계가 있는 것인가. 드뇸이 벌목공 탈출을 의미하는 걸까. 그것이 아니라면 벌목공 문제가 아닌 또 다른 문제로 채린이 납치된 걸까. 마약거래.’
  생각이 더 이상 풀리지 않았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또 무슨 생각을 해야 할 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답답함만 가슴 가득히 차올랐다.
  내가 채린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어떤 것도 없었다. 더욱 괴로워하고 있는 것도 그 점 때문이었다.
  속이 담뱃불의 열기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말없이 소파에 몸을 묻고 있는 동안 따냐와 알리에크는 석고처럼 굳어있었다. 그들은 채린에게 무슨 일이 생겼거나 최소한 내 신상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직감하면서도 차돌멩이같이 굳어버린 내 표정 때문에 말을 걸지 않았다. 하나같이 눈만 끔벅거렸다. 손가락만 움직여도 뚝하는 소리를 내며 덜 익은 석고같이 부서질 것 같았다.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숨소리만 방안에 고였다.
  “장 기자님 무슨 일이 생겼나요?”
  따냐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녀는 내 날카로운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말을 뱉고는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녀의 말투에는 긴 침묵이 안겨다 준 무게가 그대로 배어 있었다.
  알리에크는 내 눈치를 살핀 뒤 슬며시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김 선생님께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하지요. 그렇지요?”
  따냐의 알토란같은 말투와 총총한 눈빛이 내게 급히 달려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입니까.”
  “............”
  “말씀을 하셔야지요.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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