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린이 머물렀던 아파트는 문이 굳게 잠겨있었다. 문을 열고 관리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방안이 어수선했다. 간단한 가재도구들이 여기저기 버려져 있었고 옷가지들은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었다. 대부분 그의 옷가지들이었다. 다급하게 빠져나간 흔적이 발자국같이 뚜렷이 남아 있었다. 주방에는 한국산 컵라면과 과자봉지, 일회용 주사기 등이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아파트는 방 두 칸과 주방이 전부였다. 안방쯤으로 보이는 곳의 문을 열자 러시아산 특유의 메케한 향수냄새가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벽에는 여자들의 요염한 나체 사진이 너절하게 붙어 있었고 침대 주변에는 여자의 낡은 팬티와 스타킹 그리고 마약 투입에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일회용주사기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나는 주방과 화장실 사이에 있는 서너 평 남짓한 방으로 들어갔다. 눅눅한 냄새가 역겹게 배어 나왔다. 빈 방에는 스프링이 내려앉은 침대와 간이 옷장 그리고 몇 권의 책들만 뒹굴었다. 방의 상태와 달리 비교적 잘 정돈되어 있었다. 침대시트는 가지런히 깔린 상태였다. 오늘 밤이라도 누군가가 올 것에 대비 해 깔아놓은 것 같은 착각마저 일으켰다. 하지만 채린의 흔적이 묻어있을 만한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방안 구석구석을 뒤졌다. 침대시트를 벗기고 그녀의 체취를 느끼기 위해 사냥개같이 코를 킁킁거렸다. 구석에 놓인 빈 상자를 뒤지기도 했고 간이 옷장을 엎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체취를 느낄만한 것은 없었다. 나는 침대 모서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채린이 이곳에서 겪었을 일들이 주마등같이 스쳐갔다.

이 침대에서 밤을 새며 나를 애타게 기다렸을 거야. 아들의 모습이 그리울 때마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을 거야. 얼마나 그리웠을까. 또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나는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온 몸에 있는 땀구멍들이 일제히 문을 열고 체내의 열기를 쏟아냈다.

그 많은 날들을 혼자서 두려움에 떨며 견뎠으리라고 생각하자 가슴이 성난 불길같이 타올랐다.

채린을 데려간 그를 만난다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느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먹어버리고 싶다는 분노를 느꼈다. 배를 헤집어 그의 내장을 질긍질긍 씹는 하이에나의 비정함이라고 말해도 좋다. 독수리가 들짐승의 눈알을 파먹는 잔인함을 느껴도 할 수 없다. 나는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그의 심장을 후벼 팠다. 칭칭 휘감기는 내장을 뽑아들었다. 미끈거리는 잔인함이 나를 못살게 굴었다. 피비린내가 후각을 마비시켰다. 손가락으로 그의 눈알을 뺀 뒤 만지작거리다 옆에 웅크리고 있던 고양이에게 던져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 의식같이 그의 손톱을 뽑았다.

나는 손가락이 아려오는 것을 느끼며 두꺼운 책을 형체도 알아볼 수 없으리만큼 갈기갈기 찢고 있었다.

나는 막다른 골목에서 느끼는 허탈감을 한 권의 책을 찢으며 분풀이를 하고 있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번지르르 번졌다.

침대 시트를 뒤집었다.

그 때였다. 침대 시트와 스프링 사이에 아무렇게나 접힌 종이조각이 꽂혀 있었다. 예사 종이조각 이려니 했다. 낡은 스프링 침대의 삐거덕 거리는 소리를 막기 위해 꽂아둔 것이려니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채린의 편지 조각일 수도 있다는 실낱같은 바람에서 급히 그것을 집어 들었다. 메모지는 책장을 찢어 만든 것이었다. 어설프게 접힌 메모지를 펴는 순간 깨알같이 박힌 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채린이 남긴 메모였다. 다소 흘려 쓴 글씨가 나를 더욱 숨 가쁘게 했다.

이들이 나를 어떻게 하려는 걸까. 어디로 데려 가려는 걸까. 속 시원히 말이라도 해 주었으면 차라리 좋겠다. 왜 나를 이곳으로 데려 왔을까. 내게 무엇을 요구하려는 걸까. 그이와 아들이 보고 싶다. 미치도록......드뇸? 드뇸?”

메모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채린의 글씨가 명확했다. 무엇 엔가에 쫓기며 쓴 글이었다. 극도의 불안감이 녹아 있었다.

채린이 이곳에 있었다. 그렇다면 어디로 갔을까. 드뇸, 드뇸이 무엇을 의미할까. 그가 도대체 아내를 어디로 데려간 걸까.’

머릿속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수많은 회로가 복잡하게 얽혀 도저히 한 가닥도 잡아내지 못할 것 같았다. 전자제품의 속같이 머리가 어수선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메모지를 접어 잠바 주머니에 넣고 방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올 때 내 발은 허공에 뜬 채 헛발질을 하고 있었다.

마음이 천근의 무게를 느꼈다. 나는 불규칙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울분을 속으로 삭히며 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드뇸? 드뇸? 12시 이후, 오후에?”

드뇸은 오후를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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