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 현장에서 상담의 한 시간은 모든 에너지가 총동원되는 시간이다. 에너지의 총동원이란 것은 모든 신경 세포가 내담자의 모든 곳에 집중되어 있다 라는 것이다. ‘상담’이 직업이기도 하지만, 이미 상담사의 자실에서 늘 습관화 되어있고 익숙해져 있다. 그것이 내담자에 대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신뢰이기 때문이다. 또한 상담의 한 시간이 실제 3시간 정도 소요되는 시간이다. 만약 2시간 상담이었다면 적어도 4시간 이상의 시간을 소요한다. 내담자와 함께 있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스스로 갖는다.필자의 경우도 상담에 저녁이 끝나는 경우에는
우리의 심리는 자주 불안을 느낀다. 왜 불안할까?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은 알고 있을까?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색해야 한다. 그 간절함이 돈, 사랑, 명예, 직위 등 다양할 것이다. 그러면 ‘간절함’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자신에게 냉정하게 물어봐야 한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줄 정도의 간절함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볼 일을 다 보고나서 남은 짜투리 시간을 이용한 간절함이었는지는 자신만이 그 진실을 안다. 죽음의 고개를 넘을 만큼의 간절함이 아니라면 그것을 간절함이 아니다.심리적인 갈등은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 것
우리에게 분노의 감정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된다. 이 말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안의 분노를 탐색해봐야 한다. 우리는 부정의 감정을 나쁜 것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긍정의 감정으로만 자신을 성장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이해하고 타인을 수용할 수가 없다. 살아가면서 긍정의 감정만으로 말하고 느껴야 하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 그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부정의 감정은 자신을 다시 살게 하는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도 없는 떠난 가족, 그리고 남겨진 가족들에 대한 아픔, 미리 자
인간은 자기 안에서 경험을 통해서든, 배움을 통해서든 스스로 조금씩 진화한다. 진화한다는 것은 무조건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 아니다. 퇴화되는 부분과 생성되는 부분이 함께 존재한다. 이처럼 우리는 완전히 좋거나 완전히 나쁘거나 하나만 존재하지 않는다. 상처 없이 성장할 수 없고, 성장에는 고통이 따르는 것과 같다.우리는 상대방이 거짓인 줄 알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온 마음을 다하는 것을 왜일까? 그래서 ‘설마’가 사람을 잡나보다. 설마(서울馬-의 준말)에 탄 마귀가 사람을 잡는다는 말이다. 설마가 넓은 영토에서 뛰어놀던 말
내 손에 무언가를 늘 움켜쥐고 있다면 손의 기능은 사라지고 만다. 어쩌면 조금씩 소멸되고 있는 기능을 느끼지도 못한 채 더 움켜쥐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사람관계에서 오는 욕망이고 물질에 대한 탐욕이다. 쌀을 한 줌 움켜보라. 어떻게 되는지를 경험하라. 조금씩 빠져나간다. 그래서 더 많이 움켜쥐려고 한다. 더 많이 움켜쥐려고 할수록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분식 가게에서 단무지 코너를 보게 되면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세요’라고 써져 있다. ‘필요한 만큼 가져가세요’도 아닌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세요’ 일까를
‘너는 나 없이 못살아’, ‘너처럼 상처 많은 사람을 누가 받아 주냐’, ‘네가 떠나지 않는 이상 나는 널 떠나지 않을거야’, ‘너는 나를 놓치면 너 인생은 완전 비참해질거야’ 등으로 마치 자신이 없으면 안 되는 세상처럼 한 사람의 소중한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사람이 있다. 상대방의 약점을 마치 사랑하는 냥 군림하려한다. 상대방은 그런 말들을 들으면서 오히려 수치심과 죄책감이 올라온다. 그러면서도 관계를 유지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 사람과 나는 진실로 안전하고 편안한 관계인가? 아니면 사랑하는 관계가 맞는가? 자신의 감정을 솔
아픔을 잊으라는 것,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거라는 것,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평정심을 찾으라는 등의 언어는 심리적 폭력이다. 정서적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당사자에게는 고통이다. ‘언어’라는 도구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여 다른 사람과의 의사소통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언어’는 그 사람의 삶의 방식, 그 사람의 삶의 역사의 결과물일 수 있다. 자신의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하는 우리는 지지를 하고 충고를 해 준다. 특히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그러한 지지와 충고가 자기식대로의 경험임을 훨씬 잘 들어낸다.상
인간의 질투와 시기심은 한 인간을 파멸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이기심은 인간의 선함을 뛰어넘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종말에는 선함이 압도적이란 걸 믿고 있지만, 우리가 함께 사는 동안은 이기심이 많은 사람을 이겨낼 방법은 딱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은 ‘36계 줄행랑’입니다. 정확히 第36計 주위상(走爲上)으로 달릴 주(走), 할 위(爲,) 위 상(上으)로 전쟁에서 위험에 처했을 때 퇴각시켜 손실을 줄이는 것이 상책이라는 36계 최후의 전술입니다. 즉 사기꾼이 마음먹고 덤비면 피해 갈 수
매일같이 싸우는 부모가 싫어서 고등학교 때 집을 나온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유흥업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겨우 생활을 버터야 했습니다. 21살 때 술집에서 남자를 만났습니다. ‘사랑 한다’는 말에 속아서 결혼을 했습니다. 일 년도 채 되지 않아서 남편이 외도를 하였고 모아놓은 2천 만 원을 몽땅 가지고 나가버렸습니다. 지금은 네 번째 만난 남자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는 않지만 마음은 참 편하게 해주는 남편입니다. 이렇게 50대가 되어보니 엄마를 싫어했던 마음이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그 때 엄마는 왜 도망가지 않
‘억울함’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이 진짜 억울함일까요? 그 안의 솔직한 마음은 무엇일까요? 그 억울함이 누구에 대한 분노일까요? 정말 보고 싶은 것은 억울한 감정이었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기대가 좌절되는 것과 욕망대로 되지 않음에서 오는 억울함이었습니다. 진짜 억울하냐고 자신에게 묻고 답해야 합니다. 억울함의 의미가 자신에게 어떤 뜻을 지녔을까요? 사람마다 그 언어가 의미하는 것은 다르게 저장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김치’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빨간 김치’를 떠올리게 되고, 어떤 사람은 ‘물김치’를 떠올리게 됩
독자들로 하여금 피하고 싶은 사람을 어떻게 알아보는지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필자라고 사실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 사실 잘 모릅니다. 특히 사람을 좋아하는 필자는 더더욱 사람 잘 못 알아봅니다. 다만, 그런 사람들을 많이 경험하고 나니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거라고 말했습니다. 또 한 가지 독자의 이야기를 전하면, 저 또한 그런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숙연해졌다는 말씀을 듣고 ‘맞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는 말과 함께 깊은 사색을 하게 되었습니다.생각보다 우리 주변에 피하고 싶지만 그렇지 못하고 그들 때문에 시달리
우리는 좋은 사람이고 싶어 하고,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삶이 그리 호락호락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더 흥미진진한 듯 합니다. 역설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대화를 하다보면 ‘이런 사람은 만나고 싶지 않다, 이런 사람은 피하고 싶다’라는 각각의 유형이 있습니다. 사람과 소통하며 살기에 ‘사람간의 관계’는 빠질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피하고 싶다’라고 생각해 본 적인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잘 살아오셨거나 자신 외엔 무관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만큼 사람에게 한 번 이상 상처
제목 자체부터가 왠지 불편한 감정을 올라오게 합니다. 그러나 흔하게 겪는 사람관계에서의 상처가 아닐까합니다. 필자 또한 그 속에 포함되어 있으닌까요. ‘이런 사람을 만만하게 본다. 그 이유는 뭘까’ 참으로 많은 시간을 가지고 주변 사람들의 각각의 대인관계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하였고, 연구 논문 자료나 인문학, 심리학 관련 책 등에서도 드러납니다. 단지 표현하는 언어의 차이가 있을 뿐, 그 내용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을 만만하게 본다’ (1) 진짜 착하고 순수한 사람 (2) 착한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 (3) 학업, 경제
‘나는 무엇 때문에 힘들어 하는가?’ 물음에 답을 먼저 제시하면 어린 시절의 두려움, 불안전 애착, 자기감 통합의 부족, 자신의 결핍, 취약함, 열등감, 낮은 자존감 등에 의해 힘들어 합니다.그리고 양가감정의 심할 경우에도 그러합니다. 양가감정은 동일한 대상에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가진다는 뜻입니다. 한편, 이 질문 자체에 반론을 제시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주는 경우에도 ‘나의 잘못입니까?’라고 반문을 합니다. 이런 경우와 자연재해인 경우는 다른 관점이기 때문에 이 내용에서는 다루지 않습니다.동창생 모임이
우리는 서로 대화 중에 ‘상처’라는 단어를 흔하게 사용합니다. 상처는 왜 받을까요? 라는 질문에 많은 전문가들은 ‘나의 중심성’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중심적인 사고를 하게 됩니다. 자신의 사고가 긍정왜곡이 많은지 부정왜곡이 많은지 또한 공평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서 각자가 가지고 있는 상처의 크기는 똑같은 상황일지라도 차이를 나타내게 됩니다.우리들의 내면에는 어떠한 상황과 무관하게 끊임없이 일어나는 불안과 두려움, 죄책감, 분노, 열등감, 수치심, 인
조철현 감독의 영화 〈나랏말싸미〉에서의 극 중 대사이다. ‘복숭아씨가 몇 개인지 누구나 알 수 있지만, 그 씨 속에 복숭아가 몇 개인지는 누가 알겠느냐’란 대사를 듣는 순간 ‘아!’ 감탄의 소리가 절로 나왔다. 표현의 적절함이 그 어떤 말보다도 의미의 깊이가 크게 느껴지는 색다른 경험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은 정해놓은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 온 삶이었는가? 아니면 자신 안의 무한한 창조성의 열어 두고 수용하며 포용하는 자세로 삶을 살아왔는가? 또한 관계 속에서 선입견과 편견으로 다른 사람을 아프게는 하지 않았는가? 어쩌
밤새 환청이 들린다. ‘넌 인생 낙오자야, 실패자야, 인간관계에서도 완전 패배자야. 살아서 뭐할래’ 평소에 이명(耳鳴)이 있어서 파도소리는 간간이 들리지만, 이렇게 자신을 향한 무차별한 말은 너무 자신에게 가혹했다. 죽어야 될 것 같은 밤을 꼬박 뜬 눈을 새어보는 일은 손가락을 뽑을 정도다. 어설프게 아는 것이 병(病)이라고…… 망상, 우울증, 강박, 공황 등 아는 단어들을 별을 헤아리듯 세어본다. 무서움과 두려움에 누군가를 찾으려 했지만, ‘이 새벽에 다른 사람한테 민폐야’ 그 생각이 먼저 자신을 제압했다.자신을 더 괴롭게 했던
나는 정말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일까? 많은 질문을 받았다. 기질에 따른 예민함과 환경적 요소에 따라 예민함은 서로 다른 차이를 가져온다. 기질에 따른 예민함은 자신도 모르는 채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거나 행동의 조급함과 결단의 성급함을 함께 지니고 있다. 그러나 환경에 의한 예민함은 특정부분에 대해서만 예민하게 반응한다. 중요한 사실은 기절적인 요소나 환경적인 요소를 막론하고 자신이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의 사고에 따른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이다.자신의 예민함은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을 찾게 되면 조절이 가능하다. 기질적인 요인은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작품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서 ‘가난은 가난을 벗어날 수 없구나’ 라고 인지할 수 밖에 없는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의 가난의 표현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혐오감마저 들게 하였다. 이 영화에서 보여준 특별한 것은 가족애였다. 가난 속에서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사랑을 표현하고 그 사랑을 믿으며 살아간다.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욕심을 채우는 그런 구조가 아니다. 그런 모습에서 ‘가난은 싸움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였다.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돈의 형태에 따라
인간관계는 언제 깨질까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나만 옳다’라고 주장하는 동시에 깨집니다. 가뭄에 쫙쫙 갈라진 땅처럼 동시다발성으로 깨지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유리를 바닥에 떨어트렸을 때의 깨짐과 같습니다. ‘나만 옳다’라고 주장하는 내용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두 번째,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을 때 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사람의 기질과 성향에 따라서 교묘하게 말을 포장하기도 하고, 약한 척하며 타인의 동정을 받으면서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가는 사람도 있고, 대놓고 자신의 성향을 들어내는 사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