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톡톡: 백 아홉번째 이야기] 재난에 대처하는 지도자의 일관성
그날은 올들어 가장 많은 눈이 내린 날이었다. 충남 서천수산물특화시장 상인들은 성수품을 미리 주문해놓고 설을 준비했다. 명절 대목을 잔뜩 기대했던 이들에게 날벼락이 떨어진 건 지난 22일 밤 11시께. 수산동 쪽 점포 1층에서 불길이 치솟으면서부터다.
불은 강풍을 타고 삽시간에 시장 전체로 옮겨붙었고, 점포 292개 중 78%(227개)를 태웠다. 누군가에는 인생 전부였을 삶의 터전은 9시간 만에 잿더미로 변했다. 대통령실은 이날 새벽 1시께 대변인 서면 브리핑을 통해 “가용 인력과 장비를 총동원해 화재 진압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대통령 지시사항을 전했다.
국민의힘 공보실은 이날 오전 기자들에게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이 오후 1시 화재 현장을 찾는다고 알렸다. 약 2시간 뒤, 대통령실도 용산 출입기자단에 현장 방문 계획을 공지했다. 대통령의 현장 도착 예정 시간은 1시 30분. 한 위원장과 조우 가능성이 점쳐졌다.
언론과 취재진은 두 사람의 현장 만남과 이후 동선, 갈등 봉합에 모든 초점을 맞췄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위원장이 왜 서천에 왔느냐는 본질은 빼놓고. ‘윤·한 갈등’도, ‘김건희 명품백’도, 이날 내린 눈 속 ‘브로맨스’에 다 묻혔다.
윤 대통령은 이날 전용 열차를 타고 현장을 찾았다. 용산 대통령실에서 차를 타고 출발해 열차로 이동한 뒤 다시 차로 현장까지 오려면 적어도 2시간은 족히 걸렸을 터. 그런데 화재 현장에 머문 시간은 20여 분에 불과했다. 그마저 한 위원장과 현장을 둘러본 뒤 상인대표만 만나고 떠났다. 대통령 오기만 오매불망 기다리던 ‘2층 상인들’은 외면한 채.
대통령실 메시지는 기가 찰 지경이었다. “현장에 나온 150여 명의 피해 상인들은 대통령의 방문에 감사를 표하고 눈물로 어려움을 호소했습니다.” (23일 김수경 대변인 서면 브리핑)
‘150여 명의 피해 상인들’은 윤 대통령 방문에 감복해 눈물을 흘린 게 아니었다. 그들이 쏟아낸 건 얼굴 한 번 비치지 않고 들른 듯 다녀간 대통령을 향한 분노였다. 적어도 현장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만큼 피해 상인들과 만나 위로하고, 함께 대책을 논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았을까.
참 이상한 데자뷔다. 이 정권은 시작부터 지금까지 재난 사고 대응 능력에 매우 취약하다는 것이다. 이태원 참사 때도, 오송 지하차도 참사 때도 그랬다. 피해자를 대하는 태도 역시 왜 저럴까, 싶을 만큼 국민 정서와 괴리감을 드러냈다.
다행히 이번 서천시장 화재에서 인명 피해는 없었다. 그래도 현장 복구부터 상인들 일상 회복까지 처리할 문제가 하나둘 아니다. 대통령과 집권 여당 비대위원장은 속히 이곳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시라. 임시시장 설치도 서두르시라.
실의에 빠진 이들에게 따듯한 말 한마디, 손 한 번 잡아주지 못한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만회하려면. 오늘도 화재 현장에는 그날 내린 눈이 채 녹지 않았고, 상인들 마음속 천불도 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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