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재개발 앞둔 100년 역사 철도관사촌
떠오르는 골목과 저물어가는 주거지역 괴리

대전 동구 소제동 천변가. 차들이 길게 줄지어 주차돼있다.
대전 동구 소제동 천변가. 차들이 길게 줄지어 주차돼있다.

아직 도로 포장 작업이 다 끝나지 않은 대전역 뒤편 소제동에 연이어 택시가 오간다. 폭이 좁은 천변가에는 이미 차들이 빽빽이 늘어서있다. 임시 공휴일인 지난 17일에도 사람들은 재개발을 앞둔 이곳 골목을 찾았다. 

소제동 철도관사촌은 일제강점기 시대 철도 종사자들이 거주하던 곳이다. 1905년 경부선이 생기며 대전이 철도의 도시로 급부상했고, 일본인 철도 기술자들이 이곳에 모여들었다.

당시 100여 채의 관사가 지어졌으나 한국전쟁을 겪으며 대부분 허물어졌고, 현재는 30여 채가 남아있다. 지금의 소제동 원주민들은 대부분 1960~70년대 이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

친구와 연인 혹은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골목을 오간다. 힙(hip)한 카페와 음식점은 사람들로 붐비고, 저마다 핸드폰을 꺼내 문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소제동 골목 카페 모습.
소제동 골목 카페 전경. 초기 소제호 프로젝트로 남아있는 관사촌과 오래된 주택을 매입해 총 10곳의 가게가 문을 열었고, 현재 8곳이 영업 중이다. 붐이 일어나자 일부 개인 가게들도 생겨났다.

도로를 한 가운데 두고 반대편은 인기척도 없이 조용하다. 관사 몇 곳을 리모델링해 전시장, 사진관 등으로 쓰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주거지역이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차례대로 오래된 이발소와 세탁소, 미용실, 페인트집이 나온다.

소제동을 3번째 찾았다는 최영길(28) 씨는 대전시민이다. 최 씨는 최근 소제동 재개발 소식을 듣고 다시 한 번 이곳에 들렀다.

“근처에 아파트가 지어진다고 해서 한 번 와봤어요.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는데 밖은 그대로, 안에는 세련되게 꾸민 카페들이 분위기 있다고 느껴져요. 반대편에는 오래된 집들이 있는데, 영화도 촬영했다고 알고 있어요. 인근에 대동 하늘공원도 잘 꾸며놨는데, 물론 집들이 낡았으니 언젠간 새로운 건물도 지어 개발도 돼야겠죠.”

소제동 주거밀집지역 골목길 모습. 영화 세시봉 촬영장소이기도 하다.
소제동 주거밀집지역 골목길 풍경. 영화 세시봉 촬영장소이기도 하다.

주거 밀집 지역은 옛 정취가 그대로 남아있다. 대부분 작은 마당이 딸린 집이다. 담벼락 너머 나뭇가지에서 떨어진 감이 골목을 나뒹군다. 작은 창문 사이로 TV 소리가 새어나오는 곳도 있지만, 전혀 사람 손길이 닿지 않은 빈 집도 여러 채다.

산책을 나온 주민 이성림(70) 씨는 이곳에서 7년째 살고 있다. 대전이 고향이지만 젊었을 적 외지 생활을 하다 고향으로 돌아왔다. 

“신안동 길 생기면서 전에 살던 사람들은 전부 나가고 외지 사람들이 다 매입했지. 원주민들은 어쩌겠어요. 돈 조금 준다니까, 살기 어려우니까 떠나야 하잖아요. 재개발한다고 해놓고 이제 4, 5년 있다가 또 뭐가 만들어지니까 지금 땅 값이 들썩들썩 올랐죠. 진짜 원주민들은 억울하지. 여기 땅 많이 가진 사람 없어요. 다 조금 가진 사람들이 자식들 뒷바라지나 하다가 남은 것 갖고 전세방이나 가고 그런 거죠.”

소제동 일대가 포함된 삼성4구역 재개발사업은 지난 2009년 개발 계획이 수립됐으나 최근에야 사업에 속도가 붙었다. 떠날 수 있는 사람은 벌써 떠났고, 떠나야만 했던 사람들도 이미 짐을 쌌다. 지난 10년 간 재개발 구역으로 묶여있는 동안 절반 이상이 빈집으로 남았다.

주민 이성림 씨.
주민 이성림 씨가 소제동 재개발 추진 사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 집 두 채, 세 채 있어도 딴 데 가서 아파트 한 채 못 사지. 뭣보다 ‘내 집이 어떻게 개발이 될 것이다’하는 내용도 몰라요. 주민들이 힘 합쳐야 하는데 원주민들은 다 빠지고 투기해서 사놓은 사람들밖에 없잖아요. 진짜 원주민들은 땅을 판 게 아니라 뺏겼다 싶은 생각이지. 못 살고 돈이 급하니 보상 받았는데 이제 와 보니 정상가격인가요? 행정에선 철도공원이니 아파트니 하면서 조금 조금씩 계획을 터뜨리는데, 결국은 뺏아가는거지. 대전역에 굶는 사람들이 여기 와서 잡니다. 차라리 목포 손혜원이 같은 끗발 있는 사람이라도 있음 좋았겠지.”

빈 집은 폐허 수준이다. 허물어지기 직전인 담벼락과 쓰레기더미가 이곳이 재개발지구임을 상기시켜준다. 길 건너 5000원짜리 커피를 파는 세련된 카페와 이탈리안, 태국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 골목 분위기와는 이질적이다. 

“10년 동안 질질 끌면서 자포자기하게 만들어 버린 거지. 50년, 60년 하꼬방에서 살면서 밥벌어먹고 지키고 살아온 땅을, 기왓장 주워다 만든 집들인데, 지금 그게 집입니까? 하루 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지.

개발은 분명히 해야죠. 이대로는 못 사니까. 근데 여기 카페가 들어오든 뭐가 들어오든 주민들이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 땅 값 올라가면 우리가 부자 됩니까? 그래도 그지 됩니다. 대전 판자촌 보세요. 100가구 쫓아내고 아파트 지어 1000가구 들어옵니다. 억울해하면 뭐해요. 정치인도 되기 전에 한때뿐이지 지금은 전화하기두 어려워요.”

60년 넘게 소제동에서 이발소를 운영해 온 주민 이종완 씨. 얼굴이 작게 나와도 좋으니 가게 앞에서 사진을 찍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60년 넘게 소제동에서 이발소를 운영해 온 주민 이종완 씨. 얼굴이 작게 나와도 좋으니 가게 앞에서 사진을 찍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60년 넘게 소제동에서 이발소를 운영해온 이종완(83) 씨도 재개발을 앞두고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이 씨가 운영하는 대창이용원은 대전 기네스에도 오를 만큼 오래된 곳이다. 그는 20대 시절부터 이곳에 살았다.

“뭐 엄청 서운한 건 없어. 그만할 나이도 됐는디. 재개발 할 때까지만 일한다 한 게 지금 몇 년이여. 십년도 더 됐어. 어차피 여기 있는 사람들은 거진 아파트 못 들어가. 철거할 때 땅이 500만 원, 건물이 100만 원씩이었어. 앞에 도로 깔 때 600만 원씩 받었는데 지금 팔라면 1000만 원이라데. 웃기지. 이전에 판 사람들은 못 들어가.”

오래 전 과거의 영광도 회고했다. 한 때는 대전에서 잘 나가던 부촌이었지만 지금은 소외되다시피 십 수 년 간 방치된 동네. 그도 처음에는 재개발에 반대하려 했었다.

“나는 일제시대 때부터 교육도 받고 일본 순사들이 긴 칼 차고 온다고 하면 울다가도 뚝 그쳤는데. 지금도 일본놈이라고 혀. 여기 관사가 100년이 넘은 건데, 그때는 충청남도 대전이었지. 둔산동도 없고 유성뿐이 없었구. 도청 있던 대흥동이 최고 부자 동네였구, 그담에 검찰청 있는 선화동, 그리고 3번째가 여기 철도관사였어.

대전 시내에서 여기 가자고 하면 기사가 어이구 좋은 데 사시네요 그럴 때여. 일본사람들 철수했을 때도 깨끗혔지. 관사 사이에 거리도 넓고. 근데 그 사이에 계속 집을 짓다보니 이렇게 된거여. 철도청, 열차사무소, 철도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는데, 관사도 1등 관사, 2등 관사 다 달랐다구.”

소제동 천변가 주택. 담벼락이 허물어지기 직전이다.
소제동 천변가 주택. 담벼락이 허물어지기 직전이다.

소제동 도시재생의 일환으로 ‘소제호’ 프로젝트를 기획해 들어온 외지 청년들에 대한 경계심도 엿보였다. 서울 종로구 익선동 골목길 재생에 성공한 ㈜익선다다 도시재생 스타트업 기업은 몇 년 전 이곳에 들어와 관사와 주택 10여 채를 매입해 카페, 음식점 등으로 리모델링했다. 

“나이 먹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 오니께 좋지. 대구서도 오구 서울서도 왔다는데 주말엔 줄을 서 아주. 카페 같은 것두 많이 생기구. 그 사람들이 재개발을 반대하자는디 첨엔 나두 그럴려고 했는데 이제 나이도 많고 안 한다 했지. 근데 알고 보니 대전 사람들이 아니라데. 주민들이 찬성이 75%가 넘는데 어떻게 하것어. 나두 며느리들이랑 한 번 식당엘 가봤는데 이태리 국수라고 하는디 말아서 먹는 거. 별 것 없더라구. 우린 삼겹살이나 갈비탕 같은 것이 좋은디.”

쪼그려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일부 주민들은 재개발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종종 침묵했다. 날이 저물고, 천변가에 늘어서있던 차들 절반이 빠져나갔다. 떠날 수 없지만 떠나고 싶은 사람들, 또 주민들만의 시간이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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