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요섭 관사촌살리기운동본부장
“역사를 지킨 사람과 지운 사람, 다큐제작”

이요섭 관사촌살리기운동본부장.
이요섭 관사촌살리기운동본부장. 그는 어린시절 지금은 레스토랑이 된 소제동 한 주택에서 살았다. 

소제동 철도관사촌이 포함된 대전 동구 삼성4구역 재정비지구 사업이 ‘지속가능한 도시재생’ 차원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10년 묵은 재개발 사업이 최근 동력을 얻었지만, 반대쪽에선 관사촌에 대한 가치 조명 작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기 때문.

관사 4채에 대한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지정이 추진되는가 하면, 지역 국립대 차원의 도시재생 프로그램도 시동을 걸었다. 가장 최근엔 로컬 탐방을 주제로 한 유명 TV 프로그램 촬영지가 되기도, 스타 건축가의 눈에 띄어 새로운 잠재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관사촌살리기운동본부 차원의 목소리도 점차 커지고 있다. 쇠락한 역세권을 살리겠다고 꺼낸 대전시의 개발 관점이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있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21일 소제동 관사16호에서 이요섭(58) 관사촌살리기운동본부장을 만났다. 관사촌 재개발을 둘러싼 오해와 지속가능한 도시 개발, 갈등 조율 방안에 대해 이야기 나눠봤다.

대흥동 뾰족집 사례로 본 근시안적 보존 논리

소제동 한
소제동 도로가 옆 건축물에 걸린 현수막.

이 본부장은 지금은 레스토랑이 된, 소제동의 한 주택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의 모친은 철도 승무원 기숙사 식당을 운영했다. 소제동 골목은 그가 뛰어놀던 운동장이었다.

관사촌 일부 소유주들은 지난 8월 문화재청에 문화재등록 신청을 마쳤다. 대상지는 대나무숲이 남아있는 풍뉴가, 관사 16호, 마당집, 두충나무집 4채다.

이 본부장은 “문화재등록까지 꽤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본다”며 “대전시는 소제동 문화재 조명 가치 작업을 이미 해왔고, 한때 이곳을 살리려 노력했던 적도 있었다. 사업성 없던 재개발 사업이 시행된 건, 몇 년 전부터 대전 부동산 경기가 좋아진 점이 한 몫 했다고 본다”고 했다.

등록문화재 신청에 대해선 “보존 가능성, 가치 확인 차원의 시도”라고 설명했다. 2008년 대흥동 뾰족집 사례도 예로 들었다. 

1929년 건립된 뾰족집은 대전 철도국장 관사이면서 대전 근대주택 중 가장 오래된 곳으로 꼽혔다. 2008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으나, 2010년 재개발조합 측에서 목조 뼈대만 남겨놓고 철거해버린 사건이 있었다. 이후 대흥동 한 귀퉁이로 이전 복원됐으나, 원룸과 모텔 일색인 골목으로 옮겨져 그때의 명성은 잃었다.

이 본부장은 “그때 겨우 벌금 300만 원 약식기소 처분이 내려졌다”며 “등록문화재라는 것도 강제력이 없다는 얘기다. 이번 문화재 등록 추진은 관사촌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보존 가치를 확인하고, 이를 시민들과 공유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대전시가 제안한 ‘이전 후 존치’ 중재안에 대해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시 차원의 보존 논리에 ‘지속가능성’이라는 중요한 가치가 배제됐다는 이유에서다.

이 본부장은 “관사를 이전해 복원한다면, 독립기념관 앞에 전시된 탱크와 무엇이 다르냐”며 “아직 생명력이 있는 근대 건축물을 대하는 시의 단적인 발상이 실망스럽다”고 했다.

“사람들이 몰리기 전, 소제동은 어둡고 희망도 없던 곳이었다. 재개발이 수차례 무산되면서 원주민들도 다 떠났다.

그런데 누군가 들어와 생기를 불어넣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시 구절처럼, 관사촌은 오래된 담, 빛바랜 골목 안에 사람과 함께 있어야 비로소 생명력을 가진다. 이전이나 복원 차원에서 바라볼 문제가 아니다.”

일제강점기 제국주의 역사 ‘오명’

영화 쎄시봉 촬영이 진행된 소제동 골목길 풍경.
영화 세시봉 촬영이 진행된 소제동 골목길 풍경.

소제동 철도관사촌은 1920년대에 조성되기 시작했다. 일본인 철도 종사자들이 둥지를 틀면서 형성됐다는 이유로 ‘일제 강점기 제국주의 시대의 부산물’이라는 존치 반대 논리가 따라다녔다. 

이 본부장은 “침략의 역사든 식민지 역사든 지운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도, 부순다고 해도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런 근시안적 사고에서 탈피해야 할 때도 됐다”며 “일본 히로시마 원폭 피폭지에 1년에 1500만 명이 방문한다. 반면 사료적 가치로 찬반논란이 뜨거웠던 조선총독부 건물은 김영삼 시대에 철거됐다. 지금 그 가치를 돌아보면 어떤가”라고 되물었다.

그러면서 그는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과거의 역사를 지울 권리가 있는지 되묻고 싶다”며 “근대문화유산 보존에 사활을 건 목포, 군산, 익산을 봐달라. 올해 통영에 근대역사문화거리가 지정됐다. 김경수 경남지사가 벤치마킹하기 위해 들른 곳이 바로 소제동이다. 얼마전 유현준 건축가는 인근 대덕연구단지와 연계한 새로운 잠재력도 제시했다”고 설명했다. 

‘일제강점기 관사촌’이라는 역사적 가치만 부각되고 있는 점에도 아쉬움을 표했다. 그는 “지금의 소제동 풍경을 만든 건 일본인들이 떠난 후, 관사 사이에 낮은 집을 지어 산 대전의 선조들”이라고 했다.

소제동 개발 문제를 ‘대전의 정체성’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논리도 내놨다. 대전이 철도와 함께 성장한 도시라는 점을 감안하면, 관사촌은 일제 강점기 역사가 아닌 '대전의 역사'에 더 가깝다는 주장이다.

“관사는 한국인 목수들이 함께 지었기 때문에 지붕 서까래 등을 보면 한옥 건축법을 엿볼 수 있다. 쉽게 말하면 한옥식 적산가옥인 셈이다. 시간이 흐르며 2층으로 증축한 집도 있고, 여러 차례 보수하면서 한국식 건축법도 덧씌워졌다.

이곳 관사 16호는 1939년에 지어졌다. 일본인이 기껏해야 6년을 살았을 텐데, 나머지 세월은 이곳 원주민의 터전이었다. 즉, 대전의 생활사가 녹아있는 곳이다.”

지킨 사람과 지운 사람, 그리고 방관자

소제동
철도 승무원이었던 모친을 둔 소제동 원주민 김승국 씨의 집. 살면서 집을 2층으로 올렸다. 현재 내부를 보존 중이다.

개발 논리를 내세우는 측에서는 주민들의 주거권, 재산권 행사를 중요한 문제로 보고 있다. 실제 원주민 입장에선, 방치된 동네를 떠나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다. 지난 공청회에서도 주민 재산권 보호, 거주 환경 정비와 함께 관사를 살릴 수 있는 방안을 찾아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보존이나 개발 논리를 떠나 주거권도 중요한 문제다. 행정청에서 마을 상·하수도 정비나 도로 환경 문제를 지금껏 방치해왔다. 아파트가 계획대로 지어지더라도, 남은 지역은 원룸촌이 될 것이 불 보듯 뻔하고, 마을조합 등을 통해 소제동에서 창출되는 경제적 이익을 분배하는 문제도 남아있다.

재개발을 백지화해달라는 요구가 아니다. 용적률을 높이든지 계획을 다시 검토해서 최대한 살릴 수 있는 범위를 넓혀보자는 제안이다. 10년 묵은 재개발계획을 그대로 수용하기엔 그간 소제동이 많이 변했다. 새로운 협의체를 구성해 문제를 제대로 논의해달라.”

최근엔 지역 대학 차원의 움직임도 있었다. 최근 한밭대 LINC+사업단은 지역사회 공헌 차원에서 학생과 교수진이 참여하는 소제동 도시재생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 본부장은 "소제동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예정이다. 관사촌을 살리는 데 누가 노력했고, 누가 방해했고 또 누가 수수방관했는지 담을 것"이라며 "이곳이 어떻게 훼손되고 무너졌는지, 역사를 지키고자 했던 사람이 누구고, 지운 사람은 누구인지. 보물과 같은 역사를 우리 손으로 없애는 참담한 일을 목도한다면, 이를 기록하는 것도 남은 이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편, 대전시는 오는 24일 열리는 재정비심의위원회를 통해 안건을 논의한 뒤, 개발 계획 변경안을 고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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