與 '김좌진 장군' 공산당 연루 가능성 의혹 제기
한건택 원장 "반론할 가치도 없는 얘기"
김 장군 일가 재산 처분 두고 새로운 해석 내놔

한건택 내포문화관광진흥원장이 최근 정치권에서 불거진 김좌진 장군의 공산당 연루 발언 논란에 대해 "발론할 가치도 없는 이야기"라고 평가하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김좌진 장군의 재산 처분과 관련해 "전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김다소미 기자. 
한건택 내포문화관광진흥원장이 최근 정치권에서 불거진 김좌진 장군의 공산당 연루 발언 논란에 대해 "발론할 가치도 없는 이야기"라고 평가하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김좌진 장군의 재산 처분과 관련해 "전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김다소미 기자. 

최근 윤희석 국민의힘 대변인이 군 정신교육 교재에 김좌진 장군 등 독립운동가 이름이 빠진 이유에 대해 '공산주의 연루' 가능성을 언급하며 논란을 일으켰다. 김좌진 장군의 주된 독립운동 무대였던 북간도 등이 공산주의 토대였기 때문에 연결됐을 것이라는 논리다.

윤 대변인의 이 같은 발언과 해석을 두고 한건택 내포문화관광진흥원장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굳이 반론할 가치도 없는 이야기”라고 비판했다.

한 원장은 지난 18일 <디트뉴스>와 만나 최근 김좌진 장군 등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역사적 사실이 폄훼되고 왜곡되는 것과 관련해 “독립운동사에 대한 전반적 이해가 부족한 것”이라며 “정치권에서 이념논쟁으로 몰고가는 것일 뿐, 역사적 의미도 없다”고 혹평했다.

한 원장은 김좌진 장군의 고향인 충남 홍성군 출신으로, 만해 한용운 선생을 비롯해 김 장군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과거 행적과 독립운동사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홍성군 갈산면 백야사(白冶祠)에 있는 백야 김좌진 장군의 영정 모습. 자료사진. 
홍성군 갈산면 백야사(白冶祠)에 있는 백야 김좌진 장군의 영정 모습. 자료사진. 

한 원장은 독립운동가의 행적을 연구하거나 이해할 때 단순히 감정적으로 봐라봐선 안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나라를 빼앗겨 분노하고 독립운동을 했다는 맹목적 사고는 독립운동가들의 이성적 의지를 폄훼하는 것”이라며 “그들이 왜 그 길을 갈 수 밖에 없었는지를 알려야지 단순 우상화로 번지는 것은 지양돼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한 원장은 특히 김좌진 장군의 박애정신을 강조하면서 함께 언급되는 노비해방에 대해 다른 견해를 내놓으며 이 같은 독립운동가 우상화를 견제했다.

그는 “몇십년 전부터 역사학자들이 주장해온 김 장군의 노비해방은 상식적으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며 “1차 갑오개혁때 모든 노비가 해방됐는데 역사학자들은 김 장군이 17세 되던 해 집안의 모든 노비를 풀어줬다고 주장한다. 갑오개혁 후 10년이 지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지금 역사학자들에게 김 장군의 노비해방 근거가 됐던 건 1932년 당시 동아일보가 기획 연재로 보도한 기사 때문이다. 기자의 주관적 견해가 삽입됐을 수도 있고, 당시 현장 취재를 했다고 보기 어려운 여러 지점이 있다”고 평가했다.

1910년(경술, 융희4) 5월 5일에 최중철(崔中轍)이 형 최중식(崔中軾)에게 보낸 편지로서 편지의 앞 장이 유실되고 없는데, 김좌진(金佐鎭)의 농지를 구매하는 계약에서 대금은 6월 12일 안에 서울에서 지급하기로 함, 추수 때 금년도 종자 볍씨와 결세(結稅)를 공제하기로 함 등의 조건을 말한 다음에 계약서 문안을 적어보냈다. 계약서 문안은 김좌진(金佐鎭)이 이해 6월 10일에 홍주(洪州) 행촌(杏村)·이동(梨洞)·상촌(尙村)·증산(曾山)의 논을 매도하고 이 광호(李光浩)가 보증인이 됨 등을 적고 있다. 한건택 원장 제공. 
1910년(경술, 융희4) 5월 5일에 최중철(崔中轍)이 형 최중식(崔中軾)에게 보낸 편지로서 편지의 앞 장이 유실되고 없는데, 김좌진(金佐鎭)의 농지를 구매하는 계약에서 대금은 6월 12일 안에 서울에서 지급하기로 함, 추수 때 금년도 종자 볍씨와 결세(結稅)를 공제하기로 함 등의 조건을 말한 다음에 계약서 문안을 적어보냈다. 계약서 문안은 김좌진(金佐鎭)이 이해 6월 10일에 홍주(洪州) 행촌(杏村)·이동(梨洞)·상촌(尙村)·증산(曾山)의 논을 매도하고 이 광호(李光浩)가 보증인이 됨 등을 적고 있다. 홍주성역사관 제공. 

그러면서 오랜 기간 일제강점기 당시 제작된 홍성군 토지조사서를 통해 발견한 새로운 사실도 공개했다.

한 원장은 “우당 이회영 선생의 경우 신흥무관학교 설립 등 일가족 전체가 전 재산을 팔아 만주로 망명해 항일 독립운동을 펼쳤다. 많은 이들이 전재산을 처분해 독립 자금에 사용했단 사실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고 평가한다”며 “김좌진 장군도 그렇다”고 말했다.

한 원장이 말하는 김좌진 장군의 재산 처분은 그가 홍성군청 토지조사 시스템을 통해 김 장군의 안동 김씨 일가 집성촌(갈산면 일대) 전답과 임야 대부분이 1917년도에 집중적으로 처분된 사실을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왜 김 장군 일가 재산이 1917년도에 집중 매매됐는지, 이들의 땅을 매입한 사람이 홍성의 또다른 독립운동가 최중식 선생의 집안인지에 대한 물음이다.

김좌진 동생 김동진의 68필지, 급매로 내놓고 만주로 이동
재산 처분한 돈, 독립 자금으로 썼다고 보는 게 상식

김좌진 장군은 많은 이들에게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던 무관의 이미지가 강하다.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많은 재산을 상속받았는데, 그의 재산 처분 과정을 추적하다보면 당시 독립운동에 독립운동가의 자산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수 있다.

한 원장은 “홍성군청이 일제강점기 때 만든 토지대장을 다 뒤졌다. 1913년도 기준, 김좌진 장군 동생인 김동진 명의의 68필지 땅을 발견했다. 어마어마한 규모”라고 말했다.

그의 이 같은 주장은 홍성 지역 독립운동가 최중식과 전양식이 주고 받은 서신을 최중식의 후손이 2022년 홍주성역사관에 기증하면서 뒷받침됐다.

수집된 유물은 김좌진 장군의 재산 처분과 관련해 최중식 선생과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한 전양진(1873~1943) 선생이 대화를 나눈 서신 등이다.

해당 편지에는 김 장군이 최중식의 아들 최명용 선생(파리장서 운동 참여)에게 ’내 땅을 빨리 팔아달라‘며 재산 처분을 독촉하는 대목이 나온다.

1910년(경술) 농사철인 미상의 날짜에 최중철(崔中轍)이 형 최중식(崔中軾)에게 보낸 편지로서, 문서의 뒷 장이 유실되어 발신정보가 없다. 다른 편지와의 내용 연결 관계로 보아 이해 3월 말쯤의 것으로 추정된다. 의숙(誼叔, 의 아저씨)이 공무(公務) 중에 곤욕을 겪었다 함, 서울 김완진(金完鎭)에게 토지측량 도본 10장을 보냈는데, 그 접수인이 전용기(田溶起)로 되어있다 하니 사정을 알아봐 주시기 바람, 그리고 왕동(旺洞)의 논은 김좌진 (金佐鎭)이 와가(瓦家)의 전생원(田生員)에게 일 처리를 맡겼다고 하며 급히 매도하려는 듯함 등을 말하고 있다. 홍주성역사관 제공.
1910년(경술) 농사철인 미상의 날짜에 최중철(崔中轍)이 형 최중식(崔中軾)에게 보낸 편지로서, 문서의 뒷 장이 유실되어 발신정보가 없다. 다른 편지와의 내용 연결 관계로 보아 이해 3월 말쯤의 것으로 추정된다. 의숙(誼叔, 의 아저씨)이 공무(公務) 중에 곤욕을 겪었다 함, 서울 김완진(金完鎭)에게 토지측량 도본 10장을 보냈는데, 그 접수인이 전용기(田溶起)로 되어있다 하니 사정을 알아봐 주시기 바람, 그리고 왕동(旺洞)의 논은 김좌진 (金佐鎭)이 와가(瓦家)의 전생원(田生員)에게 일 처리를 맡겼다고 하며 급히 매도하려는 듯함 등을 말하고 있다. 홍주성역사관 제공.

한 원장에 따르면 1911년도부터 1913년도까지 김 장군의 일가인 안동 김씨들이 가진 땅 중 상당 부분이 최명룡 집안으로 명의가 바뀐다.

한 원장은 “팔아달라는 편지가 발견됐고, 그 이후 명의가 바뀌었다는 건, 최씨 집안이 김 장군의 땅을 산 것”이라며 “독립운동했던 동지끼리 서로의 재산을 처분해주고 돈을 주고 하며 독립 자금을 마련했던 정황”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김좌진 일가의 재산은 1917년 상반기 6개월 동안 집중 처분됐는데, 이해 후반에 김 장군이 만주로 넘어간다. 이때 그의 생가도 함께 매매된다.

한 원장은 “상당히 충격적인 것”이라며 “만주로 가기 전, 자기 집까지 팔아가며 자금을 마련하고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투입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그러면서 “이회영 선생 못지 않은 재산 처분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노비해방을 한 김좌진 장군보다 전 재산을 다 팔고 만주로 건너간 김좌진을 다시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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