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솔길에서 만난 다산(45)         

“소나무 단에 하얀 돌 평상은
바로 내가 거문고 타던 곳이라네
산사람(山客)은 거문고를 걸어두고 가버렸지만
바람이 불면 절로 소리를 내네” 

 

다산이 다산초당에 머물던 시절, 문산 이재의(1772~1839)와 주고 받은 시 가운데 하나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묻혀 있다 새롭게 발굴되어 지난 2006년 한국학 학술지 ‘장서각’ 14호에 소개된 바 있다. 이재의는 비록 노론 핵심세력에 속했으나 다산과 사단(四端)논쟁을 벌이는 등 학문적 교감을 치열하게 나누었던 지기였다. 당시 영암 군수였던 그의 큰아들 집에 기거하던 이재의가 초당을 찾아 왔다가 운자를 나누어 시를 주고받았던 것이다.

바람이 불면 절로 소리 나는 거문고-. 정말 시속을 멀리하고 자연을 벗해 사는 사람한테서만 나올 수 있는 절구이지 않은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노력으로 이런 다산의 명시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학계에서는 다산의 시작(詩作) 가운데 아직도 미발굴의 상태로 묻혀 있는 시들이 꽤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여유당전서』에 실린 다산의 시들을 편찬해 만든 『다산시문집』만 보더라도 그렇다. 시문집 제5권의 맨 끝에 나오는 아전들의 횡포를 고발하는 내용의 「용산리」(龍山吏) 「파지리」(波池吏) 「해남리」(海南吏) 등 3부작은 경오년, 즉 1810년 6월에 쓴 작품이다.

이어 제6권 맨 처음에 나오는 「송파수작」(松坡酬酌)이라는 시는 무자년(1828) 5월5일 단오날에 쓴 것이다. 그리고 편집과정에서 어찌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제7권에 귀향 후 쓴 「귀전시초」(歸田詩草)란 시가 등장한다.  이 연작시는 기묘년(1819)에 지은 것으로 귀향 바로 이듬해의 작품이다. 말하자면 이 「귀전시초」는 다산이 고향에 돌아온 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지은 수백여 시 중 (『다산시문집』 상으로 볼 때) 첫 작품이라 할 만하다. 다산 시는 시문집 제1~7권까지 총 2000수 가량이 수록되어 있다.

정리하자면, 1810년 6월 이후부터 1819년까지 햇수로 10년간은 시문집에 실린 다산의 시가 단 한 편도 없는 것이다. 나는 이를 기록의 멸실로 본다. 누군가는 이 시기에 다산이 시작을 멈춘 게 아닌가 하는 이야기도 하지만 언어도단이다. 병들어 누워 있거나 심지어 꿈속에서 얻은 운자를 동원해서까지 시를 지어댄 다산이 10년간 시를 굶었을(?)리는 만무하다. 이 기간은 다산초당에서 생활이 여러모로 완숙기에 달해 있어 시적 환경이 무르익은 때이기도 했다. 특히 1818년 9월 유배가 풀린 다산이 해배길에 올라 마재에 돌아 오기까지에는 그의 시심(詩心)이 그를 가만두지 않았을 게다.

“그 옛날의 맑은 강 빛이
해마다 사람을 생각하게 하누나
백사장은 벌창한 물에 따라 변하고
고기잡이 길은 물가에 새로 났네
옛 일을 회상하니 묵은 자취 슬퍼라
의기 소침한 이 몸이 애석하구려
못가에 우뚝이 서 있는 돌이여
늘그막에 너와 서로 친하자꾸나”

(「윤서유를 대동하고 바위밑에서 작은 배를 띄우다」)

“구사일생으로 돌아와 망연하기만 하구나
지팡이 집고 때로 다시 강변에 기대 섰나니
한 떨기 누런 잎새 그윽한 마을엔 비 내리고
비 개인 두어 산봉우리엔 석양빛이 걸려 있네
거룻배는 정히 이 늙은이를 실을 만하고
갈매기와는 모쪼록 여생을 함께 할 만한데
아, 무릉에 돌아가 제사지낼 날이 없어라
현몽한 이가 백발의 신선인가 의심스럽네”

(「동쪽 언덕에서 석양을 바라보다」)

연작시 「귀전시초」 앞머리에 나오는 두 수의 시이다. 18년의 모진 유배세월 끝에 고향에 돌아온 다산의 정한(情恨)이 애처롭게 다가온다. 두 번째 시 첫 구절 ‘구사일생으로 돌아와’에서 다산은 ‘백사귀래’(百死歸來), 곧 백번 죽어 돌아왔다는 표현을 썼다.

 다산은 어렸을 적부터 시재(詩才)가 출중했다. 잘 알려진 대로 7세 때 지은 「산」이란 제목의 시는 주위 사람을 깜짝 놀라게 했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네
멀고 가까움의 지세가 다른 탓이지”
(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그리고 그는 10세 이전에 일찌감치 자기가 지은 시들을 정리해 「삼미자집」이란 시집을 냈다. 꼬마 시인으로 명망을 날린 그는 20대 후반 조정에 진출하고서도 시재로 주위를 압도했다.

1795년 2월 혜경궁 홍 씨의 회갑축수연이 화성에서 성대하게 끝난 뒤 서울로 돌아온 직후의 일이다. 얼마 전 병조참의로 승진한 다산이 병조에서 숙직하던 어느 날 밤이었다. 정조가 어려운 시제(詩題)를 주면서 칠언배율(七言排律, 배율은 한 수가 10구 이상이 되는 율시) 100수를 새벽에 문을 열 때까지 지어 바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다산이 밤을 새워 지어올린 시를 보고, 임금은 크게 감탄하여 칭찬하고 큰 사슴가죽 한 장을 상으로 내려 주었다.(금장태, 『백성을 사랑한 지성, 다산평전』)

“오늘 이 사람의 작품은 귀신처럼 빠른 점에서는 시나 부(賦)보다 낫고, 법도에 맞는 점에서는 표(表)와 책(策)보다 못하지 않으니 이처럼 진실한 재주는 보기 드문 것이라 하겠다”

노론 벽파의 문장가이자, 훗날 신유사옥 때 재판관이었던 규장각 제학 심환지도 다산의 이 ‘칠언배율 100수’에 대해 극진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꾸불꾸불 뻗어나간 것은 구름이 뻗어나가고 물이 흐르는 것과 같고, 깔끔하고 치밀하기는 옥을 다듬고 비단을 짜놓은 듯하니, 이러한 사람을 두고 이른바 문단의 드문 재주(文苑奇才)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호학의 군주 정조는 조정의 문신들을 내각에 불러 모아 놓고 자주 시 짓기 시합을 즐겼던 모양이다. 『다산시문집』을 보면 「내각응교시」(內閣應敎詩)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 정조는 이 자리에서 승지로 하여금 담배 한 대를 피우게 해 그것으로 제한시간을 정하고, 시제를 내리는 방식으로 시합을 진행했다. 다산은 이 시험에서 곧잘 수석을 차지해 비단도포, 내구마, 호피 등을 하사 받았다. 한창 잘 나가던 득의의 시절이었다. 그러나 어찌 허구한 날 햇볕만 쨍쨍 내리쬘 수 있겠는가?

“책상자 정리하고 하얀 먼지 터는데
어린 딸 쓸쓸히 책상머리 앉아 있네
차츰 알겠네, 먹고 입는 일밖에 딴일 없음을
깊이 깨닫네, 문장이 사람에게 이롭지 않음을
늙어 총명 줄어드니 어찌 책을 대하랴
자식들 노둔하니 제 몸 하난 편하겠지
단칼로 끊으려다 아직도 미련남아
이별함에 매만지며  잠시 또 사랑하네”

1794년에 지은 「책을 팔며」라는 시이다. 아버지 정재원의 삼년상을 마치던 해였으니까, 막바지 무관시절의 곤궁했던 때였던 듯싶다. 급기야 상자를 정리하면서 내다 팔 책을 꺼내 놓고선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이별할 책을 만지작 거리고 있는 다산의 궁색한 얼굴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문장이 어떻고 총명이 어떠니 하며 짐짓 자기합리화의 변을 늘어놓는 그의 익살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다산초당 설경. 다산은 이 곳 초당에서 자연과 인생을 노래한 서정시와 사회의 구조적 비리를 고발한 사회시 등 주옥 같은 작품을 남겼다. 
다산초당 설경. 다산은 이 곳 초당에서 자연과 인생을 노래한 서정시와 사회의 구조적 비리를 고발한 사회시 등 주옥 같은 작품을 남겼다. 

 

1796년에 지은 「이 또한 통쾌하지 않은가」(不亦快哉行)라는 20수에 달하는 연작시는 그가 다시 정조의 부름을 받아 승승장구하던 때의 작품이다. 이 시는 명말청초의 문인인 김인서의 같은 제목의 산문을 패러디한 것으로, 오히려 오리지널 보다 더 재치와 해학이 넘쳐난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순간순간 느끼는 쾌감을 한껏 만끽하자는 30대 중반 젊은 다산의 화통한 면모와 호연지기를 엿볼 수 있다. 몇 수 읊어본다.

“달포 넘게 찌는 장마 오나가나 곰팡냄새
사지에 맥이 없이 아침저녁 보내다가 
가을 되어 푸른 하늘 맑고도 넓으면서 
하늘 땅 어디에도 구름 한 점 없으면, 
그 얼마나 상쾌할까”

“날개를 묵히면서 굶고 있는 푸른 매가 
숲 끝에서 날개 쳐도 갈 곳 별로 없다가
매서운 북풍에 처음으로 줄을 풀고
바다  같은 푸른 하늘 마음껏 날아갈 때면,
그 얼마나 유쾌할까”

“삐걱삐걱 노 저으며 청강에 배 띄우고 
쌍쌍이 무자맥질하는 물새들을 보다가 
쏜살같이 내닫는 여울목에 배가 와서 
시원한 강바람이 뱃전을 스쳐 가면,
그 얼마나 상쾌할까”

“깎아지른 절정을 힘겨웁게 올랐을 때
구름안개 겹겹으로 시야를 막았다가
이윽고 서풍 결에 태양이 눈부시고
천봉만학 있는 대로 일시에 다 보이면,
그 얼마나 상쾌할까”
(『다산 시문집』 제3권)

지면 관계상(?) 다 옮기지는 못하지만, 이밖에도 병든 새가 조롱 속에 갇혀있듯 지내다가 채찍을 울리면서 성문 밖을 썩 나설 때, 우거진 녹음 속에 흰 종이에 먹물이 흥건하게 일필휘지하고 나면, 세간 살이 모두 팔아 괴나리봇짐 꾸려지고  떠돌다 지기지우 길에 만나 돈 열 냥 꺼내주면 유쾌‧상쾌‧통쾌하다는 시들이 연이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속담에 “말이 씨가 된다”는 게 있지 않은가. 무심코 한 말이 실제로 이뤄질 수 있으니 말조심하라는 뜻이다. 그렇듯 시인들의 세계에는 ‘시참’(詩讖)이란 말이 있다. 우연히 시로 지은 내용이 실제 일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맙소사, 다산의 「불쾌재행」 20수 가운데 맨 마지막의 시가 시참같이 돼버렸다. 

“먼 지방 귀양살이 대궐 못내 그리워서 
여관 한 등 잠 못 이루고 등불만 만지작 거린다
뜻밖에 금계(金鷄)의 기쁜 소식 전하는 말 듣고
집에서 보낸 편지를 손으로 직접 뜯었을 때,
그 얼마나 유쾌할까”

마치 5년 후 들이닥친 오랜 유배형을 예감이라도 했던 걸까? 첫 귀양살이로 머물던 곳이 머나먼 장기의 객관(客館)이었으니, 우연의 일치치고는 묘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금계의 소식’이란 옛날에 사면의 조칙이 발표되는 날이면 금계를 장대 끝에다 올려두었던 것에 유래한다. 그런데 다산의 ‘시참’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다산 스스로도 「금정시참」(金井詩讖)이라고 표현했듯이 「불쾌재행」이란 시를 짓기 이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이 이야기는 그가 지은 『혼돈록』에 자세히 나온다. 정조18년인 1894년, 다산은 절친인 남고 윤지범(1752~1846)과 함께 그의 명례방 집에서 차담을 나누고 있었다. 다산이 한창 시흥이 올라 시 한 수를 읊조렸다.

“가을 날 우물 차가운 안개 벽오동을 감싸고
두레박 소리 끊기자 까마귀 울며 지난다
다만 알겠거니 날 저물고 별이 뜰 즈음
황혼의 짧은 시간 사그러져 다함을”

옆에 있던 남고는 대단히 빼어난 시라고 칭찬했다. 그런데 이 시 맨 앞에 나오는 ‘가을 날 우물’이 ‘시참’의 씨앗이 되었다. 한시 원문으로는 ‘金井’. 가을은 오행에서 ‘金’에 해당된다. 곧 ‘가을 날 우물’은 ‘金井’이 된다. 이듬해 가을 다산은 다름아닌 금정역의 찰방으로 좌천되어 내려갔고, 과연(!) 금정역 누각 앞엔 벽오동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다산의 술회이다.

“좌천되어 이곳에 온 뒤로  유독 황혼 무렵의 시각이 가장 괴로웠다. 문득 세상만사에는 모두 미리 정해진 길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감회가 있어 시 한 수 지어 예전 시에 화답했다”

그래도 다산은 그답게 ‘이이제이’식으로 ‘시참’을 시로 치유하려 했나 보다.

“가을바람이 벽오동 가지에 불어오니 
금정역 난간가에 해 저무는 때로다
잠시 역루에 올라 술 한 잔 하노라니
막 뜬 초승달이 더디 주렴을 지나가네”

‘금정’에 얽힌 이 두 시는 『다산시문집』에는 실려 있지 않다.

“하룻밤에 모든 꽃잎이 흩날리니
집 주위  비둘기와 제비새끼 울었다오
외로운 귀양객 돌아간단 말못하오
얼마나 님과 함께 있었던가
그리워라 그리워라
슬프다 꿈속의 님의 얼굴”

강진에서 아내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표현한 시이다.

하룻밤 사이 모든 꽃잎이 흩날렸다는 것은 신유사옥으로 집안이 모두 풍비박산이 되었다는 것을, 비둘기와 제비새끼는 어린 자식들을 가리킨 것이다. 귀양살이 신세라 꿈속에서 뿐이 아내를 볼 수 밖에 없는 애틋한 부정을 형상화했다.

다음은 역시 1804년 강진 주막집에서 귀양살이 할 때 모기에 시달리며 지은 일종의 우화시이다. 제목은 「얄미운 모기」(憎蚊).

“맹호가 울밑에서 으르렁대도
나는 코골며 잠잘 수 있고
긴 뱀이 처마 끝에 걸려있어도
누워서 꿈틀대는 꼴 볼 수 있지만
모기 한 마리 왱하고 귓가에 들려오면
기가 질려 속이 타고 간담이 서늘하단다
부리 박아 피를 빨면 그것으로 족해야지
어이하여 뼈에까지 독기를 불어 넣느냐
베 이불을 덮어쓰고 이마만 내놓으면
금방새 울퉁불퉁 부처머리처럼 되어버리고
제 뺨을 제가 쳐도 헛치기 일쑤이며
넓적다리 급히 만져도 그는 이미 가고 없어
(중략)
생각하면 그 옛날 대유사(규장각의 부속건물)에서 교서할 때는
집 앞에 창송과 백학이 줄서 있고
유월에도 파리마저 꼼짝을 못했기에
대자리에서 편히 쉬며 매미소리 들었는데
지금은 흙바닥에 볏짚 깔고 사는 신세
내가 너를 부른 거지 네 탓이 아니로다”

모기에 쩔쩔매면서 과거에 잘 나가던 시절과 현재 자신의 모습을 대비해 신세타령하면서도 종국에는 ‘내탓이오’하는 다산의 품이 오히려 돋보이는 장면이다.

다산은 1818년 9월14일 고향 마재로 돌아왔다. 앞서 소개한 「귀진시초」가 향리에서의 서막을 연 시이다. 그로부터 다산은 주로 체념과 달관의 세계에 많이 머물렀다.

“백발이 초저녁의 별 나듯이 나타나“백발이 초저녁의 별 나듯이 나타나
처음에는 별 하나만 깜박깜박 보이다가
금방새 별이 둘 별 셋이 나타나고
별 셋이 나온 후론 뭇 별들이 시새우지
어지럽게 여기 저기 초롱초롱 깜박깜박
(중략)
고기가시 같은 모양 논하잘 게 뭐 있으리
앞으로 촘촘하게 파뿌리처럼 날 것인데
족집게 대령할 첩도 없는 신세거니
황정(黃精)을 가져다줄 신선이 있을손가”

처음에는 별 하나만 깜박깜박 보이다가

흰 머리가 나는 모습을 마치 동영상으로 보여 주는 듯하다. 후렴부에 나오는 황정은 약초 이름으로 일종의 보양강정제. 흰 머리 뽑아줄 첩도, 비아그라 같은 강정제를 갖다 줄 신선도 없다는 자조 섞인 넋두리가 한편으론 처연하면서도 세월의 덧없음을 받아 들이는 노년의 달관을 느낄 수 있다

“닭 한 번 울어 산가지 하나를 내리고 나면 
어허, 나이 칠십이 이제 꽉 차는구려
보건대 나이 칠십이 어디로 다 갔는고
다 마셔 버린 일곱 빈 찻잔 같네 그려”

경인년(1830) 섣달 그믐날 밤 벗들과 함께 운자를 각자 정해 지은 시이다. ‘닭 한번 울어’ 날이 새면, 곧 이 밤이 지나면 칠순이 된다는 이야기로, ‘다 마셔 버린 일곱 빈 찻잔’의 비유가 허허롭기만 하다. 

“육십년 풍상의 세월 순식간에 흘러 갔으나

복사꽃 화사한 봄빛은 신혼 시절 같구려

살아 이별 죽어 이별로 늙음을 재촉했건만

슬픔 짧고 기쁨 길어 임금님 은혜에 감격하네

이 밤 목란사(木蘭詞) 읽는 소리 더욱 정답고

그 옛날 다홍치마엔 먹 흔적 아직 남았다오

쪼개졌다 다시 합한 것 참으로 우리 모습이니

표주박 한 쌍을 남겨서 자손에게 물려주리”

1836년 2월22일 아침, 다산은 마재의 고향집에서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이 날은 공교롭게도 결혼 60주년이 되는 회혼(回婚)의 날이기도 했다. 위의 시는 죽기 사흘 전 회혼을 맞게 된 감회를 읊은 것이다.

다산은 그의 고난에 찬 인생을 ‘슬픔 짧고 기쁨 길어’(戚斷歡長)라고 짧게 표현했다. 그리고 부부의 정표로 자손에 표주박 한 쌍을 남긴다 했다.

다산은 어디에선가 이런 말을 했다.

“독서를 사탕수수처럼 즐기고, 거문고를 감람나무처럼 즐기고 시를 창포김치처럼 즐기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대로 된 것이다”

단오 날 창포로 담가 먹는 창포김치처럼 담박하고 청량한 그의 마지막 시였다.

/도시공감연구소장  김 창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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