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 학위수여식 '입틀막 사건 당사자' 올림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7일 대전 국립중앙과학관에서 열린 과학기술 정책 국민보고회에서 제가 겪었던 지난해 카이스트 학위수여식 폭력연행 사건을 언급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혹시 오셨으면 만나볼까 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저 역시 보고회 소식을 알았다면 참석했을 텐데, 참석하지 못해 무척 아쉽습니다. 만일 이재명 대통령을 만났다면 전하고 싶었던 얘기가 있습니다. 초대받지 못한 과학기술인 목소리를 들어달라는 것입니다.
윤석열 흔적 남은 R&D 예산 개혁, 청년 연구노동자 자리는 어디에?
윤석열 정부는 사상 처음으로 국가연구개발(R&D) 예산을 대폭 삭감했고, 불특정 다수를 향한 “R&D 카르텔” 몰이로 연구노동자 자긍심을 훼손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심각했던 문제는 졸속으로 이뤄진 예산 편성 과정이었습니다. 국정감사에서 R&D 예산 삭감을 최상목 당시 대통령실 경제수석비서관이 직접 주도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최상목 전 수석은 R&D 예산 31.1조 원(2023년)을 10조 원까지 삭감 검토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불필요한 예산이라고 단정하고 삭감을 감행한 것입니다.
윤석열 정부의 일방적이고 일괄적인 예산 삭감은 수많은 사람 삶에 직격타를 날렸습니다. 실제로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과 함께 R&D 예산 삭감으로 인한 피해사례를 수집한 결과, 연구노동자 계약해지, 인건비 삭감, 대학원생·학연협동과정학생(학연생) 입학 포기, 연구 중단·축소 피해 사례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정부 R&D 예산안에도 윤석열 정부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글로벌 R&D, 도전혁신형 R&D 등 윤석열 정부 시기에 쓰임새가 불분명한 사업들이 나타났습니다. 이 중 글로벌 R&D는 "해외순방 업적 쌓기용"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2026년 예산안에서는 이러한 사업 예산이 한 층 더 증액되었습니다.
한편 윤석열 정부 시기에 삭감 타격을 크게 받은 예산도 있습니다. 연구 과제 경험이 없거나 연구가 단절된 연구노동자를 위해 지원했던 생애기본연구는 윤석열 정부를 거치며 아예 폐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 예산이 크게 증액된 데에 반해, 청년연구노동자를 위해 새로 편성된 기본연구 사업은 생애기본연구 폐지 전 수준을 회복하는 수준에 그쳤습니다. 과연 이재명 정부 연구 예산이 윤석열과 다른 새로운 길을 가고 있는지 의문스러운 이유입니다. 지난 4일 과학기술관련 노동조합들도 성명을 내고 "윤석열표 예산이 내년에도 계속 증액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지적을 경청하고, 국회에서 면밀히 예산을 점검하여 조정해야 합니다.
청년 연구노동자의 질문, 실패를 용인한다면 미래를 보장하라
과학기술 정책 국민보고회에서 새로 발표한 내용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인재 확보를 위해 매년 국가과학자 20명을 선발하는 제도를 신설해 연 1억 원 활동지원금을 제공하겠다는 것이 주목을 받았습니다. 노력에 따른 보상은 환영하지만, 극소수 미끼를 두고 경쟁하게 만드는 정책만으로 지금 청년 과학기술인이 품고 있는 회의와 실망을 돌려놓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과학기술인으로 사는 것으로는 미래의 처우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 지금 일어나는 '이공계 대탈출'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성장의 도구로만 과학기술을 보는 시선 속에서는 정부가 혁신과 도전을 만들어내기 어려워질 것입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보고회 현장에서 "실패를 용인하는 연구 환경을 만들자"라고 발언했습니다. 그러나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실패를 두려워하는 연구노동자가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청년 세대는 실패가 용인되는 환경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성장 속에서 도태되면 끝이고, 발밑을 불안하게 하는 경쟁 사회 속에서 평생을 자라났기 때문입니다.
즉 실패를 용인한다는 구호는 우리 사회 전체가 경제적 성공이 아닌 새로운 목표를 제시하고 기본적인 환경을 보편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재명 정부가 그런 연구 환경을 만들고자 한다면, 먼저 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연구노동자들과 소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장과 부흥을 넘어, 모두를 위한 과학기술을 향해
지난 9월 카이스트에서는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 분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카이스트 대학원생들은 분회 설립취지문에서 "권력의 요구와 성과 중심적 연구 환경이 연구노동자를 인권과 노동권 침해로 몰아붙였다"며 "과학기술을 사회와 민중을 위한 길로 돌려세울 것"을 선언했습니다. 성장과 부흥을 강조하는 국민보고회에서는 들을 수 없는 비전이 담긴 목소리였습니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입틀막' 언급으로 지나가듯 넘어갈 것이 아니라, 목소리 낼 기회를 빼앗긴 사람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경청했으면 합니다. 현장의 과학기술인들과 소통하려는 정부 노력이 보여주기식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