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철의 좋은 정치] 안보와 지방자치단체
나의 안보관은 대한민국 대다수 남성과 마찬가지로 논산훈련소에서 기원한다.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 나는 차갑고 외로운 밤, 별을 헤아리듯 수없이 대적관(對敵觀)을 낮게 독송했다.
“대한민국의 주적은 북한이다”, “대한민국의 주적은 북한이다”
한국전쟁 유물과 같았던 낡은 메모지에 적힌 흐린 문장 몇 줄이 안보관의 시작이었다. 북녘 하늘 넘어 주적의 위협만 막아내면 국가와 민족의 안보는 완벽히 달성될 것으로 굳게 믿었다.
이러한 안보관은 30대 중반 국방대 석사과정을 수학하며 깨졌다. 인간 안보(Human Security)라는 구한말 신문물과 같은 새로운 개념을 접하게 됐다. 깊게 설명하자면 길고 복잡하다.
간단하게 ①북한과 같은 군사적 위협만 막는다고 안보가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②인권, 기후, 경제, 식량, 보건, 민주주의 등 다양한 요소들이 보장돼야만 세계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 이런 내용으로 이해했다.
지난 12월 29일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로 179명이 유명을 달리했다. 2023년 7월 15일 청주 궁평2지하차도 침수사건으로 14명이 세상을 등졌다. 2022년 10월 29일 서울 용산 이태원에서는 159명이 사망했다.
고리 사채, 전세 사기, 보이스 피싱 때문에 수많은 안타까운 목숨이 꺼졌다. 이 모든 일련의 참사, 사건들은 국가의 안보 무능과 실패를 보여준다.
북한 방사포와 핵무기를 막는 것.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인접국 전투기로부터 영공을 방어하는 것. 예측할 수 없는 테러행위를 사전에 차단하는 것만이 안보가 아니다.
따라서 안보 임무와 역량은 단순히 국방부나 계룡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레이더기지나 지대공미사일을 운용하는 군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국민의 생명과 신체,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최일선 안보기관은 사견으로는 지방자치단체이다. 지자체에 근무하는 다양한 직렬 공직자 모두가 크고 작게 안보 책임을 지고 있고 그 역량을 갖춰야 한다.
흔히 지자체장과 그와 함께하는 공직자들은 그들의 유산을 남기려 한다. 그 자리에 없고 잊혀지더라도 대대손손 전해질 기념비적인 업적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쫙 뻗은 도로를 내고 이름있는 기업을 유치하려고 한다. 축제를 열고 상(賞)을 받고 싶어한다. 빛나는 일을 찾는 것은 일견 자연스러운 일이다. 과정에서 나름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누구는 청계천을 살려냈고 4대강도 팠다. 누구는 한 밤 중에 축제를 열고 해외 내로라하는 커피숍도 모시려 했다.
하지만 빛나진 않지만 꼭해야 하는 일이 있다. 보통 이런 행위들이 국민의 생명과 신체, 재산을 지키는 일들과 직결된다. 행사·축제 등 다중운집 행사에 앞서 경찰과 함께 현장을 찾아 동선을 살피고 경력 배치를 협의해야 한다.
나는 지자체가 해야 할 일만 제대로 했다면 지난 2022년 용산 이태원 참사는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태풍·폭우처럼 자연재해가 우려된다면 제방을 높이고 단속해야 한다. 맨홀 뚜껑에 쌓인 낙엽과 이물질을 걷어내야 한다. 코로나와 같은 감염병이 돌면 보건인력을 확충하고 예방수칙을 빠르게 전파해야 한다.
“공격수는 관중을 부르지만 수비수는 승리를 부른다”
축구 격언이다. 화려한 발재간과 스킬을 갖고 골문을 공략하는 공격수는 많은 관중을 불러 모은다. 하지만 진정 승리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궂은 일을 하는 수비수이다. 온 몸을 던져 공격수와 공을 막아내는 우직하고 투박한 움직임이 결국은 팀에게 승리를 가져다준다.
지자체 임무는 공격수보다는 수비수에 가깝다. 득점보다 실점을 막는데 주력해야 한다. 얻어내기 보다는 지켜야한다. 제1의 목표는 국민의 생명과 신체, 재산을 수많은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안전한 버스노선을 고민하고 불법 주정차를 단속하는 일, 낙상을 예방하기 위해 거리를 다듬는 일, 사회적 약자들의 사정을 이해하고 그들의 어려움에 공감하는 일, 분리수거를 잘하고 쓰레기를 함께 줄여가는 일.
이미 많은 지자체와 소속 공직자가 이러한 일을 계속하고 있고 지금보다 잘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