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 병인박해 중심지..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주교 등 순교
충남 당진시 합덕읍에 속한 '신리'는 1784년 천주교가 전해진 곳으로 알려졌다. 이 시기 신리에 정착해 살고 있던 밀양 손씨 집안을 중심으로 교우촌이 형성됐다. 1866년 무렵에는 마을 사람 400여 명 전체가 신자로 이루어진 교우촌으로 성장했다. 1865년부터는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주교가 거주했다.
신리는 삽교천 상류에 위치한 마을이다. 현재 평야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지만, 조선시대 밀물 때 배가 드나들었던 곳이다. 바닷길을 통해 외부와 접촉하기 쉽고, 교우촌들과 쉽게 연결된다는 점에서 조선 천주교회의 중요한 거점 지역으로 자리잡았다.
신리는 병인박해(丙寅迫害) 중심에 서 있었다. 흥선 대원군 명령으로 1866년 시작해 그가 실각한 1873년까지 이어졌다. 대원군은 서양 세력의 확장에 위기의식을 느꼈고, 자신의 정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천주교를 박해했다.
1866년 먼저 다블뤼 주교가 체포됐고, 이웃 교우촌에 있던 프랑스 선교사 오메르트 신부와 위앵 신부가 자수하면서 다블뤼 주교와 함께 순교의 길을 떠났다. 이때 다블뤼 주교가 거처하던 집 주인 손자선(토마스)과 사목활동을 돕던 황석두(루카)도 체포됐다.
다블뤼 주교와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황석두는 1866년 3월 30일 보령 갈매못에서, 손자선은 다음날 공주에서 순교했다.
1868년 더 큰 박해가 일어났다. 신리의 신자 19명이 순교하게 된 것이다. 이해 4월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묘를 도굴하기 위해 덕산에 침입한 사건이 발생하면서다.
오페르트는 천주교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신리 앞을 흐르는 삽교천을 이용해 남연군 묘를 찾았다. 하지만 도굴 작업은 미수로 그쳤고, 오페르트가 도망을 가면서 신리를 포함한 내포지역 교우촌 전체에 박해가 일어났다.
정치적 상황이나 특정 사건으로 천주교인 박해가 일어났지만, 신리의 신자들은 신앙에 따라 순교자의 길을 걸었다.
신리성지로부터 1.8km 떨어진 곳에는 무명 순교자의 묘가 위치했다. 이곳에 뭍힌 순교자들도 오페르트 사건 이후 생겼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천주교인 박해에 따라 신리 교우촌은 완전히 무너졌고, 단 한 명도 살지 않는 비 신자 마을로 변하게 됐다.
병인박해 이후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지만, 신리에는 오랫동안 신자들이 터를 잡지 못했다. 오랜 박해를 기억한 주민들이 천주교 신자들의 유입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1890년 들어서야 내포지역에 성당을 설립할 여건이 갖추어졌고, 1892년 프랑스 선교사 퀴를리에 신부는 신리에서 서쪽으로 2km떨어진 양촌(고덕면 상궁리)에 성당을 세웠다.
오랜 시간이 걸렸으나 신리 주민들의 믿음이 회복되면서 1923년 거더리에 공소가 설립됐다. 1927년 신리의 신자들은 다블뤼 주교가 지냈던 손자선 성인의 집을 매입해 공소로 사용했다.
1968년 병인박해 순교자들이 시복되자 신리에는 순교복자 기념비가 세워졌다. 1984년 한국 천주교 설립 200주년을 맞아 천주교 역사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신리 중요성도 부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