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백신 접종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서 백신 접종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의 경우에 백신 접종 초창기 멤버로 맞아야 했었다. 코로나19 백신 접종 1차는 2021년 4월에 ‘아스트라제네카’로, 2차는 7월에 ‘화이자’로 교차접종을 했다. 1차 접종을 하고 나서 5일 동안은 밤마다 앓았다. 아침에 먹은 약기운으로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감기몸살처럼 끙끙 앓으면서 또 약을 복용했다. 2차 ‘화이자’를 맞고 나서는 팔의 붓기와 열감으로 5일을 고생했다. 그래도 1차 때보다는 약을 먹지 않았고 참을 만했으니 훨씬 괜찮았다. 그
신용을 나타내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성실성, 책임감, 전문성 등이다. 더 세부적으로는 약속, 여기서 ‘약속’은 시간, 숙제, 공동작업등 기간 내에 잘 해내는 것부터 시작한다. 더불어 돈을 빌리고 갚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신뢰, 그리고 소통 가운데 공감정도에 따른 신뢰가 있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와서 뭔지 모를 찝찝함이 있을 경우, 그런 감정이 상당히 주관적이라 할지라도 빈번해지면 신용은 낮아진다. 즉 자신의 이야기를 주로 하되 타인의 이야기에 공감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직감으로 느껴지는 ‘그것’이
나이 50살이 넘어서 남들 앞에서 운다는 것이 참 창피했다. 그것도 어린아이처럼 억울함 때문에 ‘이 나이에 울다니’ 머릿속이 복잡한 날이 있었다. 자신을 달래고 달랬다. “이 나이가 어때서, 억울하면 울어서라도 말을 해야지.” 여러 차례 반복하니 창피함도 없어지고 시원한 느낌까지 들었던 적이 있었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자신을 위해 울어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많다. 힘든 게 당연하고, 아픈 게 당연한 듯 삶을 산다. 어렸을 때부터 참는 것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길들려졌다는, 익숙해졌다는 것
이런 질문을 받곤 한다. “제가 어떤 사람으로 보이세요?”조금 황당하면서 당황스러운 질문에 “어떤 사람처럼 보이고 싶으세요?”라고 되묻게 된다.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보여 지는지에 대해 많이 궁금해 하고, 좋은 사람으로 보여 지기 위해서 자신도 모르게 많이 애썼을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어쩔 때는 타인에게 묻고 싶을 때가 있지만 참을 때가 있다.취업이나 시험면접을 보기 위해서, 맞선을 보는 자리에서, 잘 보이고 싶은 사람 앞에서 등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았던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점점 살
이 세상을 떠난 나름대로 유명한 작가나 배우를 오늘날에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라는 질문을 이렇게 바꿔본다. 내가 죽고 난 후 얼마나 나를 기억해 줄까? 그것도 시간이 지날수록 내 삶의 흔적은 남아있기라도 하는 것일까? 유명한 작가나 배우와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들의 기억 속에는 추억처럼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대 사람이 아니라면 그것 또한 기억하는 비율을 적어진다.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기억될까? 그리고 어떤 존재이기를 원하는가? 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어린이집을 운영할 때
아무리 잘 해 왔던 관계도 떠날 사람은 떠나고, 자기 곁에 남아 있을 사람은 남아 있다. 어차피 떠나야 할 사람에 대해서는 더 아프지 않을 것에 감사하며 떠나보내야 한다. 애썼던 관계가 애쓰지 않게 될 때 그동안 애썼던 마음을 공감 받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애쓰지 않는 모습에 '관계 정리'가 된다. 여기서 ‘애썼다’는 표현보다 어쩌면 배려의 차원에서 ‘상대방에게 맞췄다’는 표현이 적절할 수 있겠다. 억지로 맞춘 것이 아니라 자신도 원해서 맞췄던 관계가 어떤 상황에서 맞추지 않았더니 ‘관계 정리’가 되어 버린 결과를 받았을 때 어떤
코로나19는 직업의 다양성과 인간관계의 형태, 그리고 삶의 방향과 태도에 있어서 많은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주어진 현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긍정적인 요소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하나의 직업을 가지고 ‘평생직업’이라고 생각했었던 것이 불과 몇 년까지만 해도 그랬다. 지금은 “몇 개의 직업을 가지고 계십니까?”라고 묻게 된다. 코로나19로 인하여 많은 자영업자들이 문을 닫았고, 다른 일터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A: 본케는 외식업이고, 지금은 2개의 부케를 하는 중이에요. 부케에 대한 불만족스러움으로 엄청 뒷담화를 했어요.
‘부모는 자녀에게 절대적인가?’에 대한 자문(自問)으로 반발심이 생겼다. 부모는 자녀에게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신뢰를 줘야 한다. 즉 자녀의 말을 무조건 믿어줌으로써 신뢰감을 쌓는 시기를 거쳐야 한다. 그 과정이 때로는 길수도 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 수없이 반복되는 거짓된 행동과 말을 경험해야 하며 그런 상황 속에서 믿을 수 없게 되는 갈등으로 미안함과 죄책감까지 갖게 된다. 자녀가 부모를 더 사랑하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함께 스터디를 하는 선생님이 어느 날, “어쩌면 아이가 제가 아이를 사랑하는 것보다
“삶이 지쳤다고 느껴질 때가 있어요. 잘 지내다가도 한 번씩 울컥하는 마음이 몰아칠 때가 있어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자기연민일지도 모른다. 또한 울컥하는 마음은 그동안의 감정을 절제했다는 증거다. 감정을 다 표현하고 살면 자신이 약해질 까봐 더 단단하게 억압하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또한 그런 경향성이 높은 부류가 있다. 특히 이성적인 사람보다 감성적인 사람, 좌측 뇌보다 우측 뇌의 분포도가 높을 경우. 기질 중에 협력조력자가 있는 사람, 일중심보다 사람중심의 경우, 스스로 주변에 사람이 없다라고 생각할 때, 주변사람들과 비교
“선생님, 요즘 제 자신을 제가 너무 많이 괴롭혀서 많이 힘드네요. 저는 모범생처럼 자라왔어요. 무탈하게 컸어요. 부유한 가정은 아니었어요. 먹고 살기 바쁘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주부였고 언니와 저는 방치된 채로 자라왔어요. 그것이 무탈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성인이 되어 생각해 보니 방임이었다는 것도 알았어요. 알아서 결정하고 혼자서 삶을 계획하고 사회생활도 했었으니까요.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하고 챙겼어요. 괴로운 것은 제가 ‘양심적, 도덕성’이 남들보다 과하다는 말을 자주 들으면서 더 잘 알게 되었는데, 그 부분이
●A; 제가 상처를 잘 받아요. 상처받기 쉬운 성격도 있나요?●B; 아니요. 상처받기 쉬운 성격은 없어요. 다만,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감정이입이 되어 스스로가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성향이 있다고 표현하는 게 적절한 듯해요.●A; 저는 상처받기 쉬운 성격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감정이입이 빠르다보니 별일 아닌데도 깊게 생각하고, 부정적으로 상황을 생각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어요.●B;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 자주 일어날수록 자신감은 떨어지게 돼요. 그 자신감이 타인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주눅 들게 되
‘마음’을 생각할 때면 ‘신록예찬’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만큼 ‘나무’를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에게 있어 ‘마음’은 ‘나무’를 닮았다. 이 말은 ‘나의 마음이 나무와 같다’라는 말은 전혀 아니다. 나무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다. 어쩌면 나무는 누구의 도움 없이는 그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것이 수동적이면서 능동적일 수 있다. 동화책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서도 나무는 끊임없이 내어준다. 그리고 걷어 들이지 못한다. 솔직히 걷어 들릴 마음이 없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그러나 나무를 찾아오는 새
나의 무의식과 의식을 차지하고 있는 대부분이 ‘인간관계’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관계’에 집착했다. 스스로 ‘집착’이란 단어를 사용할 만큼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 과정 속에는 상처와 고통, 억울함, 분노, 부정, 우울, 무기력, 체념, 비난, 극단적 선택 등 복잡 미묘한 감정까지도 그냥 스치지 못했다. 숱한 날들을 보내고 지금은 “그깟 ‘관계’가 뭐라고, 내 삶의 전부를 헌신할 정도로 집착했을까?”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는 것은 없었다. ‘한 번 맺은 인연은 끝까지 가야 한다’
희로애락을 경험하면서 자신을 가장 힘들게 하는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그 친구들의 이름은 “무기력, 게으름, 불평, 비교”였다. 여기에 겉 들여지는 친구가 “미숙함”이다. 그 친구들은 처음부터 들어내면서 접근해 오지 않는다. 그들은 처음에 ‘열정’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그것이 ‘가짜열정’이었다면 바로 ‘무기력’이란 것을 알게 된다. ‘가짜 열정’은 이런 것이다. 보상체계 속에서 있었거나 경쟁체계 속에서 살아왔을 경우 그 열정에 대한 대가(代價)가 보이지 않았을 경우에는 분노하고 시기심으로 다른 사람을 위협하기까지 한다. 자신의 미
사람과 사람과의 활동영역에서 우리는 다양한 관계망을 형성한다. 친밀도에 따라서 끈끈한 사이, 친한 사이, 공통주제로 만나는 사이, 그냥 아는 사이 등으로 나뉜다. 그런 다양한 관계 속에서 스승과 제자, 상사와 직원처럼 상하구조가 존재하는 사이도 있다. 존경했던 스승과의 관계였는데 어느 날 관계가 추락하는 경우도 있다. 친구관계였는데 연인관계로, 연인관계에서 부부로, 아는 동생오빠사이가 여보당신관계로, 이렇듯 다양한 통로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분명 중간에 어떠한 작용이 작동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존경했던 사람이
견뎌내야 하는 것은 반드시 자기성장에 도움이 된다. 견뎌내지 않아도 되는 것의 기준은 그 사람이, 그 단체가, 그 장소가 자신을 내어줘서라도 가치가 있는지를 묻고 되물어야 한다. 때로는 그러한 것들이 아니더라도 견뎌내야 하는 경우도 많다. 또한 그 물음 속에는 자신의 탐욕, 타인의 이기심까지도 철저하게 보아야 한다.타인의 이기심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견뎌내야 하는 상황이라면 자신의 어떤 욕구 때문인지를 명확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덜 아프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잘 버틸 수 있다. 무엇을 선택할 때는 각자의 가치기
살다보니, 내가 보고 싶은 사람보다 나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즐겁고 덜 아프다. 이왕이면 서로가 보고 싶어 하면 ‘금상첨화’다. 살다보니, 내 생각대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에 급급함보다는 때로는 결정하지 않고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두는 것도 방법이 된다. 관계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마음과 상대방의 마음이 충분히 다름을 알아야 한다. 서로 다른 마음일 때는 자신의 에너지를 감소시키는 일을 선택하지 않아야 한다. 자신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할 만큼 스스로 감정에 치우치더라도 에너지를 떨어지게 하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노력해
50대 인생길을 걷다보니, 사고의 깊이가 달라지고 어떤 면에서는 위축되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부분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심리적 중년은 나이 50살이 아닌 자신 스스로 중년이라고 생각할 때부터 시작되고 그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 같다. 마음은 아직도 20대에 머물러 있다고 말하면서 생각이나 편견은 장년층 못지않을 때가 있다. 필요시에 따라, 또는 매 순간 자신의 삶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특히 자신, 그리고 가족에 대한 관계망을 살펴봐야 한다.정신분석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인생의 아침 프로그램에 맞춰 인생의 오후를 살아갈 순 없다
좋지 않는 어떠한 일이 발생했을 때 습관처럼 “왜 그랬을까?” 라는 질문을 먼저 던집니다. 예를 들어, 친한 사이에 돈을 빌려주고 갚는 과정에서 다툼이 있어 한 사람이 홧김에 칼로 찔러서 한 사람이 죽었는데, 안타까운 마음에 “왜 그랬을까?”라고 합니다. 홧김에 생명을 앗아가거나 자신의 질투로 친구의 물건을 훔치거나 삶을 파괴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라고 의문을 갖습니다. 또한 원한(怨恨)관계를 따져 묻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선심(善心)을 베푸는 것처럼 말하면서 결국은 그 사람을 이용한 것임을 나중에 알게 되어
만성이 되어버린 취약점이 있습니다. 저의 큰 단점은 원하지 않는데 필요이상으로 베푸는(퍼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를 원하는 데 그 이상을 준다거나, 하나를 받았는데 그 이상을 준다는 것입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단어가 떠오릅니다. 공자는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過猶不及)“고 했습니다. 스스로 괴롭힘을 선택하는 것은 베푸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베풀었던 것을 그대로 받고 싶어서 베푼 것도 아닙니다. 혹은 어떠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심리적으로 스스로 충족하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