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는 자녀에게 절대적인가?’에 대한 자문(自問)으로 반발심이 생겼다. 부모는 자녀에게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신뢰를 줘야 한다. 즉 자녀의 말을 무조건 믿어줌으로써 신뢰감을 쌓는 시기를 거쳐야 한다. 그 과정이 때로는 길수도 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 수없이 반복되는 거짓된 행동과 말을 경험해야 하며 그런 상황 속에서 믿을 수 없게 되는 갈등으로 미안함과 죄책감까지 갖게 된다.
자녀가 부모를 더 사랑하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함께 스터디를 하는 선생님이 어느 날, “어쩌면 아이가 제가 아이를 사랑하는 것보다 저희(부모)를 더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라고 말을 했을 때, 밀려오는 미안함과 미처 알아주지 못한 아이의 마음을 꼭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에 멍했다. 자녀는 부모가 음식을 잘해주는 부모, 필요한 것을 잘 사주는 부모, 돈을 잘 버는 부모, 학벌이 좋은 부모를 원해본 적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믿는 것은 자녀가 입으로 표현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부모가 “너는 커서 〇〇되어라.”처럼 자녀는 “부모에게 〇〇되어 주세요.”,즉 부모가 어떤 무엇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조차, 상상조차 못할 일일 수 있다.
아이들의 표현은 때로는 이렇다. “엄마, 우리는 이사 안 해? 친구네는 50평으로 이사한대.”, “자동차 이것 말고 더 좋은 차사면 안 돼?”. “엄마는 왜 공부 안했어?”, “엄마는 왜 부자가 아니야?”, “엄마는 피자 못 만들어?”, “친구는 노트북 있다는데 나는 왜 없어?” 등으로 표현하기는 해도 “엄마 밖에 나가서 돈 좀 많이 벌어와.”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넘지 못하는 경계선인 듯하다. 그러나 부모는 자녀에게 90점 맞으면 “좀 더 잘해서 100점 맞자. 정신 바짝 차리면 100점 맞을 수 있잖아.”, “학원비가 그냥 땅 따서 나오는 줄 아니? 이번에 90점 못 넘으면 당장 학원 끊을 거야.”, “편식 좀 하지 마. 뚱뚱해서 못 알아보겠다.”, “이제 20살 넘었으니 네가 벌어서 살아.”, “집에서 부모랑 같이 살더라도 월세내야 해.” 등으로 협박과 인신공격을 하게 된다. 부모와 자녀와의 경계선을 넘는 사람은 어찌 보면 부모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자녀도 부모 못지않게 부모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다. 친구들끼리 싸울 때도 나를 욕해도 되지만 부모를 욕하면 그 누구도 참을 수 없는 마음이 자신보다 부모를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자녀에게는 부모도 알지 못하고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혼자 만에 생각이 있다. 그 당시 그 생각이 옳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부모도 똑같다. 자신의 말이 옳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 때는 누구의 경험이 더 많고 적음이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은 자신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서로간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는 것이다.
다툼 속에서는 상대방이 듣기 싫어하는 말들을 한다. 이것은 절대 자녀가 부모를 싫어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자신의 뜻을 인정 안 해준 것이 그저 속상해서 내뱉는 말이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한번 싸운 것으로 가족 간의 인연이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 간의 서로를 사랑하는 감정과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영화 '스틸워터'를 보면서 살인의 죄목으로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딸의 무죄를 믿어주는 아빠를 보게 된다. 딸이 억울하다고, 무죄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딸이 판사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에서는 ‘아빠가 무능력하다’는 내용도 있었다. 교도소에 들어오기 전에도 아빠의 무능력과 무관심에 대해서 친구들에게 서슴치 않고 말했다. 아빠는 그런 딸에 대한 서운함은 전혀 없고 딸을 돌보지 않았다는 자책으로 딸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혼신을 다한다. 결국 아빠의 애씀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감옥에서 나왔지만 그 뒤에 숨겨진 진실 하나가 있다. 서로 알지만 더 이상 묻지 않는 상태로 과거보다 좀 더 친근감으로 지낸다. 서로에게는 보이지 않는 신뢰가 쌓인 듯하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는 무조건 믿고 싶어 하는 강력한 힘은 무엇일까? 아니면 각자의 사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자녀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인가?중요한 사실은 딸이 교도소에서 무죄판결을 받아서 출소하였고, 아빠 옆에 딸의 자리로 돌아왔다는 사실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자녀는 끊임없이 자신의 욕구를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을 부모로부터 받는 것이 무조건 당연한 것인가? 부모는 그런 자녀의 욕구가 과하더라도 채워줘야 하는 것인가? ‘과함’의 기준은 누구 기준인가? 모든 부모와 자녀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즉 자녀에게는 자기 욕구를 채워주는 대상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시기에 경험해야 하는 것들을 경험하지 않았을 때 그것을 ‘심리적 결손’이라고 한다. 뒤늦게 찾아오는 ‘심리적 결손’에 대한 갈증은 상당히 증폭되어 있으며 쉬이 갈아 앉지도 않는다. 즉 자기 성찰을 요구하는 숙제를 덤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충분히 채워짐을 경험하는 자녀는 때론 방황하고 부딪히고 수많은 갈등을 겪더라도 자기 갈 길을 잘 가려고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