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은 가득이심리상담센터 대표
박경은 가득이심리상담센터 대표

이 세상을 떠난 나름대로 유명한 작가나 배우를 오늘날에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라는 질문을 이렇게 바꿔본다. 내가 죽고 난 후 얼마나 나를 기억해 줄까? 그것도 시간이 지날수록 내 삶의 흔적은 남아있기라도 하는 것일까? 유명한 작가나 배우와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들의 기억 속에는 추억처럼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대 사람이 아니라면 그것 또한 기억하는 비율을 적어진다.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기억될까? 그리고 어떤 존재이기를 원하는가? 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어린이집을 운영할 때 나와 동갑이 원장님이 지병을 앓고 있었는데 일을 무리하게 하면서 갑자기 세상을 달리했다.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면 그 먹먹함이 지금도 느껴진다. 수목장으로 치러졌다. 그리고 난 후 2번 정도 밖에 찾아가질 못했다. 마음에는 늘 있었는데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마치 마음이 거짓말같이 어려웠다. 가족이 아닌 이상 죽은 사람을 기억한다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에겐 어떤 의미일까? 다시 그 사람을 못 만난다는 것, 만나서 밥도 먹고 차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다는 것, 내가 보고 싶을 때 그 사람이 없다는 것 등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입장이다. 좀 더 냉정하게 말하면 중환자실에서 숨만 연명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당사자들은 너무나 괴로운데 가족들은 조금이라도 숨이 더 붙어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못할 짓을 하는 것만 같다. 어쩌면 그것은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는 이기적인 행동 같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그래서 요즘은 병원에 가서 ‘연명치료포기각서’를 미리 작성하는 사람도 많다. 

명절에 아버지를 모시고 성묘를 다녀왔다. 선산에 증조할아버지·할머니, 할아버지·할머니 그리고 옆 자리에 현재 부모님의 이름이 써진 비석이 있었다. 참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께서 폐암 진단을 받은 지 2년째가 되어가고 있다. 치료를 포기하셨고 따로 치료를 받지 않으시고 계신다. 어머니는 귀가 들리지 않으신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가 늘 걱정이 되나보다. 그것은 자녀인 우리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갈 곳 까지 손수 풀을 뽑고 비석까지 미리 만들어 놓으면서 어떤 마음으로 준비를 하셨을까 생각하니 가슴 한 편이 찡해진다.

요양원으로 시부모님을 뵈러 갔지만 어머니만 면회하고 왔다. 시부모님 모두 요양원에서 계시지만 서로 다른 건물이어서 코로나19가 시작하면서 얼굴 본지도 꽤 오래되었다고 한다.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 한다. 어머님은 휠체어를 타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움직이신다. 나는 그렇게 자주 찾아뵙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더라도 그 이유가. 이유가 될 수 없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시부모님을 뵙고 오는 날이면 며칠은 가슴이 아프다. 남편 보기도 미안함과 안쓰러움도 함께 올라온다. 나의 감정을 처리하는 방식도 회피였음을 알게 된 것도 감정을 빨리 다른 감정으로 전환시켜버린다. 머물러 있는 것에 익숙하지도 않을뿐더러 잘 표현하면 살았던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슬하에 고등학교 1학년인 아들과 중학교 3학년인 딸이 있다. 항상 기준은 ‘자신’이다. 나의 기준으로 볼 때 아들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사춘기가 시작되었고, 점점 심해져서 급기야 나는 아들에게 욕도 하고 소리도 버럭 지르고, 욱하는 감정을 자주 들어냈다. 밤새고 게임하는 아들 그보다도 나를 대하는 아들의 공격적인 태도를 이해하려고 해도 나의 이해부족과 인내심이 약하다는 것을 자주 증명하게 됨으로써 심한 좌절감을 계속해서 경험하게 된다. 무조건 믿음으로만 대해준다는 것과 ‘있는 그대로의 존재에 대한 소중함’에 대해서 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다.

부모의 보호 안에서, 소통을 잘 하는 관계가 있는가하면, 자녀의 양육이 포근하고 따뜻했더라도(부모의 입장에서) 이기적인 자녀는 분명 존재한다. 이 말의 의미는 부모가 인격적으로 자녀를 대하고 충분한 영역에서 의존하도록 펼쳐놓았다고 하더라도 그 자녀가 인격이 아닌 그것을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이용했다면 자녀를 존중했던 것이 너무 과한 것은 아니었는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즉 오히려 자녀의 이기심을 더해주는 ‘독’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항상 좋은 것이 좋은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자녀의 입장에서는 분명 ‘그들만의 이유’가 존재한다. 그리고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상처만을 우겨댄다. 그렇다보니 부모와 자녀간의 상호작용보다는 오히려 등을 지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누구의 잘잘못이라고 말하기어렵다. 서로 상대방을 입장에 대해서 생각한다고 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각자의 입장만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지닌 자기중심성이 강한 성격 때문이다. 

‘부모의 자녀’가 되어 보았고, ‘자녀의 부모’로 되어 있다. 부모가 되어보니 자녀는 무조건 부모의 사랑을 먹고 자랄 수밖에 없구나 란 생각을 든다. 무조건적 사랑이 마음이 따뜻한 사람을 형성하게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이기적인 사람이 될지, 이타적인 사람’이 될지는 자녀 그 자신들의 선택이다. 그렇다면 자녀에게 부모는 그저 빛이 필요하면 빛이 되어주고, 그늘이 필요하면 그늘이 되어주는 존재다. 설령 빛과 그늘이 없어서 만들어 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자녀들은 함께 숨을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 에너지가 충전되고 살아갈 용기가 생기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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