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우의 족보이야기]-(48)면천복씨(沔川卜氏)

   
뿌리공원에 조성된 면천복씨 조형물.전면/대전 중구
          작품명

예(譽)

조각가

복 기 형 (목원대학교 미술대학원재)

작품설명

고려 개국공신이자 시조이신 휘 복지겸 장군의 무관 이미지(투구, 갑옷)와 네게의 뿔이 상징하는 미래를 향한 웅대한 기상을 조화롭게 표현하려 했다 특히 돌조각 양옆으로 계단을 만들어 피라미드의 신성성과도 같은 경건함을 주면서 윗부분의 조각이 없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도록 독립성을 부여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뿌리공원에 조성된 면천복씨 조형물.후면/대전 중구

<뿌리공원에 새겨진 면천복씨 유래>

복성(卜姓)은 원래 중국의 중원(中原)에서 기원하였는데 당말(唐末)에 한림학사(翰林學士) 복서학자(卜筮學者)가 바다를 건너 당촌서산(唐村西山) 지금의 충남 당진군 면천(沔川)에 정착함으로서 우리나라 복씨성의 관향(貫鄕)이 되었다. 면천복씨의 시조인 복지겸(卜智謙) 장군은 태봉의 마군장군(馬軍將軍)이었는데 배현경. 홍유. 신숭겸과 더불어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고려(高麗)를 건국(918년) 하니 왕태조가 개국일등공신 대장군(開國一等功臣 大將軍)에 봉하였다. 사후에 무공(武恭) 시호를 받았으며 성종(994년)때 태사(太師:정1품 명예직)를 추증하여 태조 묘정(太祖廟廷)에 배향(配享)하였고 황해도 평산 태백산성의 태사사(太師祠)와 경기도 연천의 숭의전(崇義殿)에서 제사를 받들고 있다.

1997. 10.
면천복씨(沔川卜氏) 대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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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우 작가의 해설>

 

                                                           면천 복씨(沔川卜氏)

                                                   시조는 고려개국 4공신 복지겸

                                      복 오 아들 4형제,모두 현달(顯達:입신출세)

                                                면천 은행나무,진달래꽃 두견주

 

면천복씨의 관향인 면천(沔川)은 충청남도 당진군에 속해있던 지명으로 백제 때에는 지비(智非)라 부르던 것을 신라 경덕왕이 혜성군으로 개칭하였고 고려 현종 때 운주(運州:홍주의 옛 지명)에 속하였다.후에 감무(監務:중앙에서 파견한 감독관)를 두었고,

 조선 태종때 면천군(沔川郡)으로 고쳤으나 1913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당진군에 속한 면천면(沔川面)이 되었다.

 우리나라 복씨(卜氏)의 선계(先系)는 문헌에 의하면 당나라(서기 923∼936)의 학사(學士) 한사람이 신라 말기에 오계(五季:5 왕조에 걸쳐 문란해진 시대)의 난국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에 건너와 면천(沔川)에 정착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복씨의 본관은 면천을 비롯하여 홍주.오천(烏川).연주(延州 :강원도 영월의 옛이름).평산.구성(龜城) 등 9본이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면천복씨을 제외한 나머지 본관에 대해서는 고증할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고 한다.

 면천복씨(沔川卜氏)의 시조 복지겸(卜智謙)은 궁예가 세운 태봉(泰封)의 마군장수(馬軍將帥)로 있다가 궁예(弓裔)가 왕위에 즉위한지 몇 년만에 처자식을 살해하고 백성을 혹사하는 등 폭정이 심해지자 동료 기장이었던 신숭겸(평산신씨 시조), 배현경(裵玄慶:경주배씨의 시조),홍 유 등과 함께 궁예를 축출하기로 결심하였다. 

   
  면천은행나무(당진군 면천면 성상리 면천초등학교 내,충남기념물 제82호)

이 은행나무는 수령이 약 1,100여년 정도 된 것으로 면천의 명물로 꼽히고 있다.이 은행나무는 고려 개국공신 복지겸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복지겸이 노년에 병에걸려 자리에 누었는데 백약이 무효했다고 한다.(천식에 걸린듯?) 그리하여 그의 딸 영랑이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아미산에 올라 기도를 드렸더니 신령이 나타나 아미산의 진달래꽃을 따다 안샘물로 술을 빚어 드리고 네 집앞에 은행나무를 심고 정성을 드리면 나을 것이라고 하여 그대로 하였더니 정말 병이 나았다는 것이다. 

한일합병 후 1910년대에 면천초등학교를 건립할 때 터를 닦기 위하여 흙으로 메워져 나무의 높이가 2~3m는 묻혔다고하며 예전에는  백로가 많이 앉아 있었다고 전한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지정 보호수였다고 한다.

   
 

복지겸은 왕건에게 왕창근,송합홍 등 점술가의 예언을 설명하면서 거사를 권하여 왕건을 고려 태조로 옹립한 개국공신 대장군(大將軍;종3품 군직)으로 고려사(高麗史)에 <고려개국 4공신>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라산 백록담의 진달래꽃

면천 아미산 진달래꽃의 유래는 복지겸장군이 원인모를 중병을 앓아 식읍(食邑:공이많은 신하에게 내린땅으로 고을의 조세를 개인이 받아씀)으로 받은 면천에 낙향하여 요양을 했으나 병이 점점 깊어 그의 딸 영랑이 면천의 영산 아미산에 올라 백일 동안 지극 정성으로 기도를 하자 100일째 되는 날 산신령이 홀연히 나타나 "아미산 진달래 꽃잎을 따다 찹쌀과 안샘물로 술을 빚어 백일을 두었다가 드리고 은행나무를 너희 집 뜰에 두 그루 심어 정성을 드려라. 그러면 네 아버지의 병이 나을 것이니라."라는 계시를 받았다.

이 계시에 따라 술을 빚어 드려 병이 치료되었다고 한다. 그 후 그 효행과 함께 진달래 술인 면천두견주의 비법과 1100년이 넘은 두 그루의 면천 은행나무, 안샘, 아미산, 신선바위 등이 현재 면천 일원에 있어 진달래민속의 뿌리가 되고 있다.

면천 두견주는 중요 무형문화재 제86-나호로 국가에서 지정해 준 전통민속주이다. 찹쌀과 아미산 진달래 꽃잎, 안샘물로 빚은 두견주로 드디어 병을 고쳤다는 신비의 전설을 품고 있는 이 술은 오래전부터 이 곳 면천에서 가양주로 빚여 왔던 것으로 전해 온다.

오늘의 면천 두견주 상품은 박성흠(朴誠欽)이 상품화하여 일반인이 접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뒤 그의 아들 박찬성(朴燦成)씨가 이어 받아 생산해 오던 중 1960년초 정부의 쌀 술 제조 금지정책에 의해 생산이 중단되었다가 1980년대 향토 민속주 부활정책에 따라 1986년 11월 1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아 1989년 충남 당진군 면천면 성상리 693-1번지에 면천 두견주 제조장이 지어져 1990년 4월 26일 사업자 등록이 완료720)된 술이다. 두견주에 관한 기록은 임원16지(1764∼1840), 동국세시기(1849),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1759∼1824)에 언급되어 있다.


두견주의 효능은 진달래꽃의 향미성분과 여기서 축출된 약효성분으로 가래를 삭여주는 진해효과와 신경통, 부인냉증, 요통 등에 탁월한 효능이 있는 약용주로 동의보감에도 기술되어 있다.

당진군 면천면은 진달래천지를 꿈꾸며 진달래 시문학과 진달래 민속놀이, 진달래 음식 등 진달래 민족정서를 함양하기 위해 당진 면천에 3~4만평 규모로 당진군화인 진달래 식물원을 조성하고 있다.


1995년 3월 처음 지역특성을 살리기 위해 군도 절개지에 진달래 3천그루를 식재하기 시작하여 1996년 수순봉사단체인 향토발전진달래회(향진회)를 조직하여 진달래 가로수 및 공원을 위해 면천면사무소를 중심으로 지도자협의회, 부녀자협의회, 이장협의회와 더불어 진달래심기운동을 전개해 왔으며 1998년 당진뉴스와 함께 군화(개나리→진달래), 군목(백목련→소나무)바꾸기 운동을 전개, 1999년 6월 군화 진달래, 군목 소나무로 확정되었다.

1999년 12월 당진아미산진달래축제추진을 준비해오다 2001년 4월 14일 면천진달래민속축제 제1회 학술대회와 더불어 제1회 군화사랑 당진군민 1인 1그루 진달래심고 가꾸기 운동 전개, 제1회 면천진달래민속축제를 개최하였다.<면천복지회>

   
면천복씨 시조 복지겸장군 사당 준공 및 영정 봉안식(2009년3월27일)
   
                                     시조 복지겸장군 영정

 그 후 장군 환선길(桓宣吉)과 임춘길(林春吉) 등의 반역 음모를 적발하여 이를 평정(平定)시켰으며 벼슬이 평장사(平章事:내사문하성 등의 정2품 재상반열 벼슬)에 이르렀고 혜성부원군(?城府院君:혜성은 신라 경덕왕 때의 면천 지명)에 봉해졌다.

 후손들은 복지겸(卜智謙)을 시조로 받들고 본관을 면천(沔川)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으며 특히 고려 때에는 10여명의 평장사(平章事:중서문하성의 정2품 벼슬)와 관면 잠영(冠冕 簪瓔:잠영은 높은 벼슬아치)이 끊이지 않아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일컬어졌다. 

   

               시조 복지겸 장군 묘( 충청남도 당진군 순성면 양유리)

     무공공(武恭公) 복지겸(卜智謙) 장군 행장기(行狀記)

                       진달래 꽃으로 두견주(杜鵑酒)빚어 정성으로 봉양하자

복지겸 장군이 완쾌되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 구전
서기900년경 삼국시대의 어지러운 형국에서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개국한 1등 공신이며, 당대 최고의 무인으로 충청남도를 대표하는 자랑스런 무공공(武恭公) 복지겸(卜智謙 ?~?)의 초명은사귀(沙貴).사괴(砂?)이며 면천 복씨(沔川卜氏)의 시조이다.

태봉(泰封)의 마군장군(馬軍將軍)으로 태봉국 궁예(弓裔)가 민심을 잃자 배현경, 홍유, 신숭겸과 함께 왕건을 추대한 4기장(騎將)으로 거사 성공후 서기918년8월 1등공신으로 책봉된다.

태조 왕건은 고려왕조를 열고 개국1등공신 4명, 2등은 염상, 김락 등 7명,3등은 각지의 군웅들 포함 무려 2천명을 책봉했다.

뒤에 환선길이 난을 일으키자 태조에게 알려 진압하게 하였고 임춘길(林春吉)의 모반을 평정하였으며, 994년(성종 13) 태사(太師)에 추증되었다.

그당시 면천에 중국 당나라로부터 복학사(卜學士)라 일컫는 사람이 들어왔다.

복학사(卜學士) 가문은 기존 면천지방 호족(豪族)인 박술희(朴術熙) 가문과 손을 잡고 백성들의 의기를 모아 해적을 토벌하고 부의 축적과 함께 강한 해상세력을 형성하여 덕망(德望)과 부(富), 세력(勢力)을 고루 갖춘 강력한 집안의 후손인 복지겸 장군은 자연스럽게 왕건과 교분을 갖게 되었고 그와 함께 궁예(弓裔)의 주력부대 장수로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고려를 개국한 이후 복지겸 장군은 도성경비 및 감찰(監察)을 맡아 왕건의 최측근 무장(武將)으로서 초기의 혼란한 시기에 모든 반역음모를 잡아내며 왕권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마군장(馬軍將) 환선길(桓宣吉)과 그의 동생 향식(香寔)은 왕건을 추대한 공으로 왕건을 보필하며 숙위(宿衛)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복지겸 장군의 지략으로 가볍게 평정하였다.

또한 순군리(徇軍吏) 임춘길(林春吉), 강길아차(康吉阿次), 경종(景琮)등의 반역음모를 적발하여 제거하는 등 고려 개국초(開國初) 태조 왕건의 가장 신임 받는 장수로서의 본분을 다하였다.

태조 원년(918년) 8월에 개국 1등공신에 책봉되었고 면천지역의 토지 300경(약 180만평)을 하사 받았으며 자손대대로 세습되었다. 개국의 위업을 이룩한 장군은 고려왕조가 안정되자 고향인 면천(혜성·?城)으로 낙향하여 지역 고을들을 다스리며 마지막까지 백성과 더불어 일생을 봉사했다.

한편 효성지극한 복지겸의 장군의 딸 영랑은 전장(戰場)을 누비며 국사(國事)에 전념하는 동안 쇠약해진 아버지를 위해 정성으로 백일기도를 올렸다 한다. 이때 아미산(蛾眉山) 신령의 계시를 받아 마을에 은행나무를 심고 안샘의 물을 떠서 진달래 꽃으로 두견주(杜鵑酒)를 빚어 정성으로 봉양하자 장군이 완쾌되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도 구전(口傳)되고 있다.

복지겸 장군은 사후(死後)에도 배향공신(配享功臣)이 되어 고려왕조와 더불어 추앙을 받아왔으며, 후손들도 주요 직위에 등용되어 고려를 위해 충성과 봉사를 다하였다.

충청남도는 1995년부터 장군을 숭모(崇慕)하고 충청인의 정신문화 회복을 위해 면천지역에 진달래를 식재하고 당진의 군화(郡花)를 개나리에서 진달래로 변경하였으며, 학술세미나 및 진달래 축제 등을 통해 장군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시조 복지겸장군 비명)

고려개국1등공신 태사 복무공휘 지겸 사적비

 역사적인 인물로는 고려 때에 무신(武臣)으로 명성을 떨쳤던 복 규(卜奎:시조의 12세손)가 1291년(충렬왕17) 원나라 태종의 둘째 아들 합단(哈丹)이 침입했을 때 원주 방호별감(原州防護別監:나라에서 조사.감독 등의 일로 지방에보낸 벼슬)으로 이를 격퇴시켜 크게 명성을 날렸으며 그의 아우 복기(卜箕)는 지주사(知奏事:중추원의 관제정비 때 승선방의 정3품 장관급 벼슬)을 역임하여 가문을 일으켰다.

한편 우부승지(右副承旨:고려 때 왕명의 출납을 맡아 보던 밀직사의 정3품 벼슬) 복성진의 아들 복위룡(卜渭龍)이 공양왕때 사온서 직장(司온署:궁중에서 쓸 술에 관한 일을 맡아본 관아이며 직장은 벼슬)으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목은(牧隱) 이 색(李穡) 등과 함께 친교를 맺어 교유했으며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홍주의 여수동(麗水洞)에 은거하며 절의(節義)를 지켰다.


그의 아들 복 한은 세종 때에 호조좌랑(戶曹左郞:호조는 호구,공부,전량,식화 등의 일을 맡았던 6조의 하나이며 좌랑은 정6품벼슬)에 올라  아버지 상(喪)을 당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3년 동안 여막(廬幕:궤연이나 무덤에서 상제가 거처하는 초막을 짓고 3년동안 시묘하는것)에서 시묘(侍墓)살이를 하여 세인의 칭송을 받았다.

 맏아들 복오(卜吾)는 임천과 서천군수(舒川郡守:종4품 외직 문관으로 군의 으뜸 벼슬)를 거쳐 충청도사(忠淸都事:종5품 벼슬)를 지냈으며,

 막내 복 여(卜予)는 고원군수(高源郡守:종4품 군의 으뜸 벼슬)와 홍문관 직제학(弘文館 直提學:홍문관은 조선때 3사의 하나로 경서와 사적의 관리,문한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봄 정3품 벼슬)을 거쳐  대사헌(大司憲: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종2품 으뜸 벼슬 현재의 검찰총장 격)에 올랐다.

맏아들 복오(卜吾)의 아들 4형제가 모두 현달(顯達:벼슬이나 덕망을 높아서 이름을 세상에 들날림.입신 출세)하여 가세를 중흥시켰는데 큰 아들 복승원(卜承元)은 남원부사(府使;정3품 벼슬)를 거쳐 도승지(都承旨:승정원의 정3품 벼슬로 임금의 비서실장)에 올랐으며,

둘째아들 복승형(卜承亨)은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정3품벼슬)에 이르렀고 셋째 아들 복승리(卜承利)는 제주목사(牧使:정3품 벼슬)를 각각 역임하여 예조참의(參議:정3품 벼슬)와 황해도 관찰사(觀察使;종2품 벼슬로 감사)에 오른 막내 복승정(卜承貞:1465년 문과에 급제)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복승정(卜承貞)의 현손(玄孫;손자의 손자) 복응길(卜應吉)은 중봉(重峯) 조 헌(趙 憲)의 문인(門人)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을 따라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금산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殉節:나라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림)하여 종용사에 배향(配享)되었으며,

 그의 조카 복정웅(卜廷雄)은 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오위도총부의군무를 총괄한 도총관의 다음 종2품 벼슬)을 역임하여 명성을 떨쳤다.

 이밖에 승문원 판교(承文院 判校)를 지낸 복태진(卜台鎭)과 장령(掌令:시정의 득실을 논하고 백관을 규찰하였으며 사회의 풍속을 바로잡는 등 감찰업무를 담당한 사헌부의 종4품 관직)에 오른 복태형(卜台衡)이 유명했으며,

 병조 참판(兵曹參判:종2품 벼슬,국방부 차관)에 추증된 복 도흠(卜道欽)은 돈령부 도정(敦寧府 都正:돈령의 친밀을 도모하기 위한 사무처리하던 관청이며 도정은 정3품벼슬)을 역임한 복준흠(卜駿欽)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면천복씨 시조의 제단은 충남 당진군 순성면 양유리에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1일 향사(享祀:제사)한다.

 면천복씨(沔川卜氏)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로 3년마다 보던 과거로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로 나뉘어 봄)에 7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1명 등 모두 8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현대인물>

 복중채(대종회제3대회장).복삼규(대종회회장).북진홍(대종회사무국장).복거일(문화미래포럼대표,1987년 장편소설 '비명을 찾아서'출간).복기왕(국회의원,2010년지방선거아산시장당선).복진경(2010년지방선거서울강남구의회출마).복진원.복수경(건양대교수.의사).복정안(전기초의원).복진풍(시민청문회공동대표.국영기업인).복남규(가수).복종규(기업인) 등등

 면천복씨(卜氏)는 인구조사에 의하면
1985년에는 총 1,689가구에 7,002명 이었으며
지난 2000년에는 총 2,287가구에 인구는 7,471명으로 조사되었다. 
 
              김진우
김진우(金鎭宇)-금석문(金石文)에 관심많아 각종 비문(碑文:지석.신도비.묘갈명 등) 연구 *전국의 문화유적 탐방 지방사 연구 *족보전문가 *.민족문제연구소회원 *단재 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회원*지방자치실무연구소회원 *한국성씨연구소 대표(현) <지은책>- "한국인의 역사"(286개 성씨를 교과서에 없는 역사책으로  수록한 한국인 교양서.도서출판 춘추필법 펴냄).공주고.고려대 경영학.한국과학기술원 수료.(삼성의료원과 함께 2009년 "대한민국 성공기업 선정" 한국성씨연구소).

(2009년 올해를 빛낸 '장한한국인상' (문화)수상).
이메일 sewoor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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