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을 위해 무던히 노력한 인물

  말년에 수배로 효과는 반감


고 김옥태회장은 52년 11월 전남 신안군 압해면 가룡리에서 압회면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대전 홍익회 회장이 된후 대전으로 이사와 중학교를 다녔다.
중학시절이었던 1967년 김회장은 대전 한밭체육관에서 복싱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1999년 신동아와 인터뷰에서 ″당시 만우절날 호기를 부리다가 선배에게 실컷 두들겨 맞은 것이 계기가 되어 복싱에 입문하게 되었다″고 술회를 했다. 이때부터 그의 복싱인생은 시작되었다. 이후 대통령배 시도대항 최고선수권 3회 연속우승, 75년에는 일본에서 열린 아시아 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는 등 복싱인으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뒤 80년 은퇴를 하게된다.

당시 대전 조직폭력배는 족제비파와 목포내기파로 양립되어 있었다. 양파의 보스들이 나이가 들어 쇠퇴하자 속리산 카지노에서 함께 일하던 김모씨는 족제비파를, 그는 목포내기 파의 조직을 이어 받았다. 훗날 그에게 멍에처럼 붙어다닌「옥태파」가 이렇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다.
유명한 속리산 카지노사건으로 구속되었을 때 알게 된 모건설회사 회장의 도움으로 신성 체육관을 차리고 후배를 양성, 유명구, 장정구, 백인철 등을 지원했고 경제적으로도 성공을 했다. 여기에서 번돈으로 운영하던 레스토랑, 헬스클럽과 유성 로얄호텔, 신원장 호텔의 슬롯머신 지분을 매각하고 건설업계에 뛰어 들었다.

그는 변신을 위해 무던히도 노력한 인물이다. 대전시 아마츄어 복싱연맹회장을 비롯하여 아시아 복싱연맹 부회장, 98년 충남일보 회장, 대한 아마츄어 복싱연맹회장, 대한불교 대전충남 사암연합회 신도회장 등 과거 검은 조직에서 받았던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 활발한 사회 활동을 했다. 특히 1998년 5월 충남일보 회장으로 취임을 하면서 언론 경영자로서 이미지 구축과 변신을 시도했지만 오히려 세인들은 냉소적인 반응으로 일관했다. 그에게 변신은 그만큼 힘들고 어려웠다. 우선 사회의 고정된 시각이 변신의 공간을 제공하는 데 인색했고 자신 또한 완전한 단절이 없어 스스로 좌절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 택시기사에게 ″김옥태가 누군지 아느냐″고 묻자 ′주먹′을 불끈 쥐어 공중으로 올려 보이면서 ″의리는 있데유″하고 답하더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 또, ″과거 철없었을 때 저지른 잘못 때문에 그동안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털어 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노력과 변신을 위한 끊임없는 시도에도 불구, 말년에 또다시 검찰로부터 공금횡령혐의로 수배령이 떨어지고 도피생활에 들어가면서 그동안의 노력이 반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고 김회장의 장례는 14일 충남대 영안실에서 회사장으로 치를 예정이며 장지는 충남 공주시 반포면 상신리이다. (연락처 042-602-5001-2, 042-253-4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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