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듣기 싫은 말이지만 장원씨(44)
에게 ´성추문´이 접두어가 되었다.

 신문사 근무 시절 당시 대전대 교수로 환경운동연합에 일하던 장씨를 만난 일이 있었다. 이를 끄나풀로 쉽게 대화를 풀어나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워낙 예민한 부분이라서 말만큼 쉽지 않았다. 더구나 장씨는 ˝인터뷰를 전제로 한 전화였으면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다˝며 ˝중앙 일간지에서 사건 이후 여러 번 요청이 있었지만 한번도 응하지 않았다˝고 말한 터였다. 성추문 사건 이후 「디트news24」가 최초로 인터뷰를 하게 된 점도 부담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杞憂)였다. 일단 허락한 이상 시원시원했다. 조심스런 부분도 오히려 이쪽이 쑥스러울 정도로 거침없이, 그것도 분명하게 표현해 주었다. 그는 살아 있었고 앞으로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 움츠리고 있을 뿐이었다.

매립지에 살면서 환경의 중요성을 알렸듯이 지난 12일 또다시 편한 길을 마다하고 어려움을 택했다. 벌금형 5백만원이면 될 것을 넉달하고도 5일간 감옥에서의 노역을 원했다.

 장씨는 지금 자신만의 목표를 향해 긴 마라톤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 감옥은 물론 성추행도 하나의 교훈이었고 나이테에 불과한 것이었다.
 딱히 부를 호칭도 마땅치 않아 「교수」라는 직함을 그대로 쓰기로 했다.
 약 1시간에 걸친 대화는 그래서 가벼운 신변잡기부터 시작되었다.

-. 집이 금산이던 데 요즘은 어떻게 지내지요.

 ˝귀농을 위해 금산으로 이사갔습니다. 주중에는 서울에서 NGO 대안 대학 설립을 위해 일하고 있어요. 오는 2003년에 개교할 예정입니다. NGO녹색대학을 설립, 시민운동가를 양성하여 환경생태적인 활동을 하도록 하는 것이 설립 목적입니다. 기존 대학의 문제점을 보완해보자는 것이 취지이기도 합니다. 선진 외국에는 이러한 학교가 많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감옥행을 원하는 데는 항소포기 이유서에서 밝힌 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아 속내를 물어보았다.
 ˝중앙 10개 신문을 다 보았는데 이유를 전부 다르게 썼더군요. 총선연대 대변인 당시 불법인줄 알면서 낙선운동을 시작했고 국민들에게 문제가 되면 감옥에 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항소도 개인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보았지요. 검찰에서 1년을 구형했는데 그대로 판사가 받아 주길 내심 바랬습니다. 그런데 벌금형으로 떨어져서 당초 약속대로 감옥행을 택한 거지요. 1백25일간 들어가서 단순 노동을 하면서 제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싶습니다˝

-. 그렇다면 가족들은 동의를 했는가요.

 ˝아내와 두 딸은 쉽게 이해했어요. 부모님은 ´돈만 내면 됐지 뭐 할려고 감옥에까지 가느냐´면서 ´네가 내 명을 재촉하고 있다´고 극구 반대했습니다. 부모 심정이란 다 그런 것이 아닙니까. 지금도 펄펄 뛰고 계십니다. 매립지로 이사갈 때도 그랬어요˝

-.성추문 사건과 관련, 언론에 대해서도 할 말은 많을 텐데요.

 ˝섭섭한 점이 많았어요. 나중에 때가 되면 밝혀지겠지만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지금은 말을 못합니다. 빌미를 제공했다는 측면에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지요.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아닙니까. 하지만 어처구니없는 보도가 너무 많았습니다. 심지어 판결내용과도 달랐지요. 어느 일간지에서는 총선연대 활동을 하면서 공금을 횡령했다는 말까지 썼어요. 한 정신과 의사가 저를 섹스중독증이라고 표현했더군요. 아내는 지금도 이 기사에 대해 섭섭하게 생각합니다. 재판부에서까지 합의를 하라고 시간을 주었어요. 억울함을 인정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언론보도는 사실과 너무 달랐어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빌미는 제공했지만 ´언론이 그렇구나´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건 이후에 인터뷰를 요청하면서 ´변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했으나 다 거절했어요˝

-. 성추문 사건을 본인은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지요.

 ˝저의 경우를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한국 사회가 분명히 인재를 키우는 풍토는 아니라는 걸 느꼈습니다. 어떤 측면에서 오히려 잘 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동안 저는 승승장구했고 순수한 마음으로 일만 열심히 했습니다. 세상을 전혀 몰랐지요. 그러니까 나무로 치면 나이테가 없는 셈이죠. 총선 연대 대변인 때 일어난 그 사건이 제 인생에 나이테를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 고생보다 마음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또 이번 감옥행을 통해 마음 공부를 더 할 예정입니다. 일부에서 장원이는 갔다고 하지만 개인적으로 새로 시작하는 첫 걸음으로 선택한 길입니다. 세상이 짧은 기간동안 가정교사 역할을 많이 해주었습니다˝

환경운동에서 총선연대로 옮기는 과정에서 정치색을 띠면서 개인적인 붕괴를 가져온 것이 아니냐는 것도 장교수에게 꼭 물어보고 싶었다. 말하자면 과욕이 빚은 결과일수도 있다는 게 질문의 핵심이었다.
 ˝정치적인 산소 요구량이 나아지지 않으면 절대로 환경문제도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 평소 소신입니다. 총선연대에 일하면서 정치적인 배경이나 뒷거래는 있을 수 없습니다. 환경운동가로서 이 일도 열심히 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치권에서 환경문제를 이해해야 환경도 좋아진다고 보고 총선연대일을 하였습니다˝

-.앞으로 계획은.

 ˝시민 운동은 더 이상하지 않고 NGO지원은 계속하겠습니다. 대안대학도 그런 차원에 몇몇 인사들이 모여 저에게 심부름을 시킨 것입니다. 때가 되면 책을 쓰고 귀농을 하여 자연과 함께 살고 싶습니다˝

장교수는 자신이 몸담았던 대전대와 녹색환경운동연합, 총선연대를 비교해가면서 고맙고 섭섭한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대전대에 대해서는 매우 고맙게 여기고 있었다. 학교관계자가 복직을 권유한 점이나 대외활동을 하도록 편의를 봐준 점이 그랬다. 특히 동료들이 외면하지 않고 구치소에 면회 온 것이 그렇게 가슴에 와 닿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총선연대와 녹색연합은 그러질 않았다. 사건이 터지자마자 24시간내에 제명해버렸다. 자초지종 파악보다 제 살기위해 꼬리를 자른 셈이다.
 어쨋든 장교수는 바로 이러한 행위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제명을 하더라도 사건의 본질은 파악해야 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또, 대전시민에게는 사과를 했다. 대전인사가 환경운동과 총선연대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을 보고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것이지만 기대를 저 버린 것을 보고 또한 실망도 컷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장교수는 ´미안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약 1시간동안 진행된 인터뷰를 마치면서 장교수에게 「성추문」이라는 단어는 인터뷰 시작때 만큼 강력한 접두어 구실을 하지 못하였다. 스스로 여기에 대해 철저히 반성을 하고 이를 극복하고 있었다는 점만이 확실했다.

 



 장원씨의 항소포기 이유서(전문)

 ´총선연대´ 1심 판결에 즈음하여

 총선연대 활동은 구국의 행위였습니다. 저 자신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총선연대 상임공동집행위원장으로 그리고 대변인으로 활동했습니다. 정치 그 자체를 잘 모르긴 하지만 정치환경이 깨끗해야 자연환경도 깨끗해질 수 있다는 신념으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이 땅의 정치적 산소요구량이 낮아지지 않으면 한강의 생물학적 산소요구량도 결코 낮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지난 10여년간의 환경운동 경험으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에 1심 재판부로부터 500만원의 벌금을 선고 받았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벌금형을 받자고 실정법을 위반하면서까지 이러한 총선연대 활동을 한 것은 아닙니다. 감옥에 가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총선연대 활동 당시부터 감옥에 가겠다고 공언해 왔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 상급법원에 가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총선연대의 활동 중 일부가 실정법에 저촉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저는 그러한 실정법을 위반한 연유로 지금 여기에 나와 있고, 그래서 그 판결을 겸허히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그러나 저의 이런 결정이 검찰의 논고 내용이나 1심 재판부의 판결 이유에 전적으로 다 동의한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이렇게 하겠다는 것은 제가 공인으로 있을 때의 대국민 약속이었고, 또한 무엇보다도 이 나라의 잘못된 법, 그러므로 마땅히 고쳐져야 할 법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항의 방법이라는 것을 밝혀 둡니다.

 또한 저의 이런 개인적인 결정이 다른 분들의 항소와 궤를 달리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총선연대 활동에 관한 한, 다 제 나름의 이유와 책임과 철학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만일 그럴 자격이 있다면 다른 분들의 항소에 지지를 보냅니다.

 그리고 저는 저 자신을 돌아보고 참회한다는 의미에서도 실형을 살겠습니다. 그동안의 제 삶에 대한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오랫동안 저를 아껴주시고 지원해주신 여러 선생님들의 뜻에 부합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저와 아내 그리고 두 딸이 이렇게 이 땅에 버틸 수 있도록 따뜻한 사랑과 물심양면의 지원 아끼지 않으신 여러 선생님께 깊은 사의를 표하며, 또한 제가 그동안 시민운동을 하면서 본의 아니게 누를 끼친 많은 분들께도 지금 이 지면을 빌어 진심으로 사죄를 드리고, 앞으로 열심히 그리고 씩씩하게 살겠다는 약속을 드리면서 또 그것을 간절히 기도하면서 부끄러운 글을 이렇게 맺습니다.

 2001년 7월 12일
 서울지방법원 417호 법정에서
 장 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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