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의 눈] 기업의 선한 의도와 바람직한 예우 행정

대전충남공공어린이재활병원 기공식 모습. 대전시 제공.
대전충남공공어린이재활병원 기공식 모습. 대전시 제공.

전국 최초로 건립되는 공공어린이재활병원이 개원도 전에 삐걱대고 있다. 대전시는 건립비로 100억 원을 쾌척한 민간 기업의 이름을 ‘공공’이라는 명칭 대신 쓰려다 정부로부터 제지당했고, 시민사회는 시와 기업 간의 약속을 ‘밀실협약’이라며 힐난하고 있다.

사태의 규명 없이 뒤늦게 협약을 수정하겠다는 시의 후속 대처, 공론화과정 없이 결정된 기부기업에 대한 예우 행정이 병원의 건립 취지나 기업의 선한 의도를 훼손하는 것은 아닐지 우려스럽다.

공공어린이재활병원은 문재인 정부의 국정과제로 추진되는 사업이다. 대전뿐만 아니라 충남권역(대전·세종·충남) 전체를 아우르는 의료 인프라 차원에서 건설된다. 민간의료 영역의 사각지대에 놓여 소외돼온 장애아동 재활 서비스를 공공에서 담보하겠다는 게 이 병원의 설립 취지다.

복지부는 공공어린이재활병원 공모지침에 '병원명을 ‘○○권 공공어린이재활병원’으로 한다'는 규정을 명시했다. 이 취지를 묻는 <디트뉴스>의 질문에 부처 관계자는 ‘정체성’과 ‘통일성’ 두 가지 요건을 언급했다. 공공어린이재활병원의 정체성은 ‘공공’에 있고, 공공이 책임지는 의료기관명을 동일하게 해 정부의 정책 의지를 전국으로 확산시키겠다는 것.

이와 별개로 병원명에 민간기업 이름을 넣는 것이 공공성을 훼손하는가에 대한 입장은 엇갈릴 수 있다. 다만, 충남권역 전체를 대상으로 한 공공어린이병원 건립에 관한 중요 사항이 비밀유지협약 명목으로 공개되지 않은 점, 또 이 과정에서 한 번도 기부자 예우 문제를 공론화하지 않은 사실은 행정 신뢰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미지’와 정체성, 그리고 이름

이미지는 곧 심상(心象)이다. 떠올렸을 때 마음속에 일어나는 인상을 말한다. 가장 1차적인 이미지 형성 요인은 ‘이름’이다. 무엇이든 아이덴티티(identity, 정체성)를 만드는 과정의 첫 단추는 바로 ‘이름과 로고’를 정하는 일이다. 

이미지는 늘 변동적이다. 그래서 이미지에 변수를 더하는 일은 숙고가 필요하다. 한 이름에 담긴 것들은 이미지 측면에서 상호영향을 주고받는 공동운명체로 묶인다. 문제는 현대사회에서 이미지라는 것이 물질로 환산조차 불가능한, 가장 큰 무형의 자산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광주 아이파크 아파트 붕괴 참사가 연일 매스컴에 오르내리고 있다. 현대산업개발은 창사 이래 최대 위기에 처했다. 주택시장 보이콧 움직임도 심상치 않고, 시공사 선정을 앞둔 한 재건축 단지엔 “보증금 돌려줄 테니, 현대산업개발은 물러가라”는 현수막도 걸렸다. 비단 그 여파가 기업에만 국한되진 않을 것이다.

7년 전, 현대산업개발은 사회공헌의 일환으로 300억 원을 들여 미술관을 지은 뒤 수원시에 기부채납 했다. 시민사회는 기업이 요구한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명칭에 오랜 시간 반발했지만, 명칭은 고수됐다. 몇 년 사이 아이파크 브랜드 이미지는 한없이 추락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제와 미술관 간판을 바꿔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건물 등에 기업이나 특정 개인 이름을 붙이는 일은 더이상 낯설지 않다. 선진국에서는 명명권(naming rights) 개념을 예산 절감, 사회적 기여 관점에서 공공과 민간의 상생모델로 여기기도 한다. 다만, 대부분 지속성을 약속하고 운영까지 책임지는 경우 또는 후원 기간을 한정한 경우, 작고한 뒤 유산을 기부한 경우 등이 해당된다. 이 경우 정당성도 인정되고, 위험성도 낮아진다.

기업의 선한 의도를 예우하는 방법

푸르메재단이 운영하는 푸르메넥슨어린이재활병원 전경. 초기 건립자금은 1만 명의 시민, 500여 개 기업의 후원 등으로 마련됐다. 현재 넥슨 재단은 운영비 등을 후속 지원하고 있다. 푸르메재단 제공.
푸르메재단이 운영하는 푸르메넥슨어린이재활병원 전경. 초기 건립자금은 1만 명의 시민, 500여 개 기업의 후원 등으로 마련됐다. 현재 넥슨 재단은 운영비 등을 후속 지원하고 있다. 푸르메재단 제공.

국내 게임업계 최상위 기업인 넥슨이 사회환원 분야로 공공어린이재활 인프라 확충을 선택한 건 충분히 박수받을 만 한 일이다. 홍보 효과가 큰 스포츠 후원이나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일반적 기부 방식을 탈피했다는 점에서도 이례적이다.

반면, 공공은 이러한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전국 광역지자체 대부분이 기부자 예우에 관한 조례를 두고 있으나, 명예의 전당 설치와 기부자 예우 범위 및 방법, 기부심사위원회 설치 등 그 적극성에 있어 차이를 보인다. 이중 대전시는 시장의 책무 등 가장 기본만 담아 놓은 수준이다.  

국제전문모금가협회(AFP)는 지난 1997년 ‘기부자 권리 장전’을 배포했다. 기부 목적에 맞게 기부금이 사용되는지 확인할 권리, 재무보고서에 접근할 권리 등 기부자를 대상으로 한 10가지 권리 보장 내용을 담았다. 선진기부문화가 정착된 나라들은 기부처가 제대로 운영되는지 살펴보는 것까지 기부자의 책무로 본다.

원칙을 지키면서 민간의 변화를 수용하며, 이해관계자들의 권리까지 보호하는 수준 높은 행정을 바라는 것이 시민들의 욕심일까? 기업의 공공분야 기부를 어떤 방식으로, 지속성 있게 예우할지에 대한 좋은 방안은 집단지성 안에서 나온다. 관점을 바꾼다면, 시는 언제든 지금과 같은 질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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