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역과 실크로드를 가다 시리즈 ②

돈황 막고굴 모습

‘돈황학’이 성립될 만큼 막고굴의 불교미술을 비롯한 불교 관련 유물이 많은 돈황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우루무치에서 열차로 14시간을 달려 도착한 장액에 가 중국에서 가장 큰 와불(전체 길이 34.5m)이 있는 대불사와 토질의 색이 다양해 마치 형형색색의 빛깔로 빛난다는 칠채산을 보고 다음 날 명나라 시대 만리장성의 서쪽 끝에 조성되었다는 가욕관과 그곳 성루에서 사방으로 펼쳐진 풍경을 보면서 중국 땅의 넓음을 실감했다. 

우루무치는 신강위구르 자치구이지만, 장액과 가욕관, 돈황은 감숙성에 속한다. 이곳 도시들을 연결하는 도로는 모두 고속도로로 하서주랑의 사이에 조성돼 있다. 조성돼 있다기보다는 기련산맥 사이의 드넓은 사막에 그저 길을 낸 것으로 자연지형을 이용한 것이다. 

이 길은 옛날의 실크로드로 이 산맥을 넘으면 청해성이 있는데 남한 땅의 8배가 넘는 청해호가 있다. 이곳 중국의 서역에 와서 버스를 타고 보는 풍경 중 낯익은 모습은 옛 우리네 거리에도 많았던 포플라 나무가 많다는 것이었다. 아마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이 나무의 특성 때문일까 생각해 보았다.

하서주랑의 길게 뻗은 황량한 산을 바라보며 비록 낙타는 아니지만, 달리는 버스 속에서 필자는 실크로드에 대한 묘한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1200㎞에 이른다는 기련산맥에는 20개의 하천이 흐르고 대전서 고통받았던 미세먼지가 없고 공기가 좋아 상쾌한 느낌마저 들었다. 장액과 가욕관이 있는 주천, 돈황은 오아시스에 형성된 도시로 기련산맥의 만년설이 녹아내려 형성된 수로로 인해 사람이 모일 수 있는 도시로 형성되었다는 게 가이드의 설명이었다. 아울러 이곳에서는 중국에서도 유명한 옥이 나온다고 하는데 옥은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식품이다.

막고굴에 조각된 나한상(왼쪽). 돈황 시내에 서 있는 비천상(오른쪽).

17일 오후 2시를 넘어서 가욕관을 출발해 천산산맥과 기련산맥 사이의 하서주랑에 연이어 펼쳐진 검은색은 바위산과 평지이 한쪽 사막과 다른 쪽의 나무와 풀이 무성한 땅을 번갈아 보면서 달린 끝에 저녁 6시 58분이 돼서야 돈황 톨게이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빛나는 땅’이라는 뜻의 돈황(敦煌, Dunhuang)에 들어섰을 때 필자는 오래전에 이 도시에 와본 것 같은 친근한 느낌을 받았다. 거리는 깨끗했고 포플러나무 등의 가로수는 우거져 있었으며 고층건물이 없어 옛 우리의 도시를 연상시켰다. 도로에는 연꽃을 든 비천상이 새겨진 가로등이 있어 이곳이 불교의 고장임을 알게 해 주었으며 도시 곳곳에 아파트가 건설되고 있어서 비로소 이곳도 중국의 경제적 변모를 느끼게 해 주었다. 

시내 복판에 숙소를 정하고 밤에 이곳 야시장으로 가는 도로의 사거리에는 연꽃 위의 비천상의 모습을 한 조각상부터 야시장의 진열대와 서점의 책들은 물론 거리의 쇼윈도우와 전시된 부처상, 호텔의 벽면에 이르기까지 온통 옥 제품과 부처와 비천상으로 가득했다. 필자는 야시장에서 결국 비천상만을 찍은 포스트 카드를 사고 서점에 들어가 불교 관련 서적들을 구경하면서 이곳이 불교의 땅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다음날 돈황시내 한복판을 흐르는 하천(당하)을 지나 백마탑이라는 곳으로 갔다. 그 유명한 인도의 승려 구마라습의 흰말이 이곳에서 죽어 그 말을 기리는 탑을 세웠다고 전해진 곳이다. 이어 인근의 돈황박물관을 갔는데 외양은 단순했으나 현대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곳에서 돈황 막고굴을 조성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돈황을 조성하게 된 불교의 전래과정 등에 대한 영화 2편을 보았다. 

박물관을 보고 나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막고굴로 향했다. 몇 번의 검색을 거치고 난 후 말로만 듣던 막고굴에 이르게 되었다. 돈황 시내에서 이곳 막고굴에 이르는 지형 역시 하서주랑에서 보던 것과 같은 황량한 바위 산으로 멀리서 볼 때는 이곳에 무슨 석굴이 있을까 싶었는데 실제로 막고굴 입구에 오니 사진으로 보던 6~7층 높이의 바깥에 잔도 위에 중국식의 장식 지붕이 있는 석굴 형태가 눈에 들어왔다. 

서양화가 유병호 화백 스케치 작품.

아! 이곳이 바로 그 유명한 불교미술의 극치로 알려진 막고굴인 것이다. 필자일행은 갓 배치된 이곳 출신의 20대 여자 가이드의 안내로 오호십육국의 북량(北凉, 397~439), 서량(西凉, 400~421)시대를 비롯해 북위(北魏, 386~534)시대, 당나라(618~907)를 거쳐 서하(西夏)와 원(元)․명(明)에 이르는 1000여년의 세월동안 조성된 막고굴의 부처와 벽화 중 일부를 불 수 있었다. 

막고굴은 1000여년의 세월을 지나면서 1000개도 넘는 석굴이 조성되어 있는데 지금은 약492개의 석굴에 벽화와 부처가 안치 돼 있는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번에 필자가 본 막고굴의 입구에는 시대표시와 함께 번호가 바코드와 함께 붙어있었는데 당나라 시대의 것도 초당(初唐), 성당(盛唐) 등 세분해서 시대 표시를 해 놓았으며 北凉(북량), 西夏(서하)시대 등 필자에게는 생소한 시대표시가 입구에 붙어있었다. 이곳에서 숱한 부처 모습과 나한, 벽화 속의 화려한 불교 세계를 볼 수 있었다. 

이 막고굴 492개굴의 시대별 분포를 보면 수나라 이전의 것이 120개, 수나라 시대가 140개, 당나라 111개, 오․송시대가 40여개로 나와 있는데 필자 눈에는 당나라 시대의 벽화와 불상이 가장 눈에 띄었다. 이 막고굴의 벽화 내용은 비단 불교뿐 아니라 중국의 민간 신화가 섞여 있는 부분도 꽤 많다고 하며 우리나라 신라 시대의 명승 혜초도 이곳 벽화에 그려져 있다고 한다. 어쨌든 불교의 극락세계를 염원하는 그런 많은 벽화 이야기를 들으면서 중국인들의 외래사상을 ‘중국화(中國化)’하는 끈질긴 모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성남 전 중도일보 주필

그러나 또한편 이 사막의 도시 돈황의 막고굴에서 1000여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벽화와 불상을 만들며 수도한 그 엄청난 노력의 산물을 서양의 고고학자들이 자기 나라로 가져갔는데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대당서역기를 비롯한 1만5천권, 프랑스가 8천권의 불경과 문서가 가 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돈황학’이 성립되었다고 하는데 이 역설적인 이야기가 서세동점 시대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 돈황 막고굴과 함께 이번 여행에서 인상적인 유적은 투르판 인근 화염산 계곡에 있는 천불동 석굴이었다. 한낮의 34~5도의 뜨거운 태양 아래 투르판에서 45㎞ 떨어진 화염산의 ‘무르투크’라는 강 계곡 낭떨어지에 있는 배제클리크천불동은 투르판에 있는 석굴 중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하는데 83개의 석굴 중 벽화가 남아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그것은 이슬람교가 이곳에 전해지면서 석굴의 벽화와 불상이 우상이라고 해서 벽화를 떼어내거나 부처의 눈과 귀를 후벼판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그 처참한 모습에 몇 년 전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의 동대불과 서대불을 폭파시키던 광경이 떠올랐다. 

필자는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서 종교가 쌓아 올린 놀라운 문명과 문화의 현장을 보면서 또 한편 그 문명을 나라는 다르다는 이유로 파괴하고 또는 소유의 욕심으로 약탈하는 악순환의 역사현장을 보면서 과연 인간존재는 또 그 본성이 무엇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울러 이곳에서 만난 70대 중반의 한 일본인이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는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 역시 이번 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짧은 만남이었다.

화염산  계곡에 조성된 천불동 계곡(왼쪽). 돈황 시내에 있는 백마탑(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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