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역과 실크로드를 가다 ③

베제크리크 석굴의 벽화. 세련된 색감과 구도를 이루고 있다.

이번 실크로드 여행에서 받은 감동과 충격 중 하나는 실크로드의 드넓은 땅에는 숱한 스토리가 깃들어 있다는 점이었다.

귀국하기 이틀 전인 실크로드 여행 7일째인 5월 20일 선선(鄯善)의 쿠무타크 사막에서 사막짚차를 탄 후 투루판으로 이동해 둘러본 베제클리크 천불동이 있는 골짜기가 화염산이라는 이름의 사막의 땅이었는데 외관상에도 붉은 빛이 감도는 그런 땅이었다.

이곳의 사막 땅은 철분 성분이 많아 붉은 빛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속에서 본 화염산 일대는 정말 황량하고도 괴기영화 속에 나오는 그런 광경과 흡사했다.

그런데 이곳은 서유기의 삼장법사 일행이 여러 요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실제 무대였다는 게 가이드의 설명이다. 중국 측이 서유기 영화를 제작할 때 이곳에서 촬영을 할때 상당히 높은 산꼭대기까지 사다리를 설치한 것이 눈에 띄었는데 이 사다리가 당시 카메라 팀의 이동선로였다고 한다. 

또 이곳에는 서유기에 나오는 저팔계와 손오공의 그림과 더불어 삼장법사가 말에 탄 채 손오공과 저팔계, 사오정과 함께 걸어가는 조형물도 설치돼 있어 관광객이 사진을 찍을 수 있게끔 했다.

마치 삼장법사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과 이곳을 걸어가는 착각을 하게 할 만큼 이 화염산 일대의 풍경은 참으로 낯설고도 기괴했으며 황량하기도 했다. 이같은 이곳의 분위기가 서유기의 무대가 되었을 것이고 당나라의 삼장법사가 얼마나 열정을 갖고 불경을 구하러 인도 땅으로 갔는지 상상해 보게 되었다.

실크로드는 이러한 스토리텔링이 수없이 묻혀 있는 땅이라는 것을 이곳에 와서  들을 수 있었다. 돈황 막고굴만 해도 스토리텔링이 스며있다. 366년 낙준이라는 승려가 돈황에 있었다.

그는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수행을 하고 있었는데 명사산 쪽에서 찬란한 빛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곳에 석굴을 조성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막고굴의 많은 석굴이 시작되게 된 계기라고 한다. 

투루판시 교외 10km 지점에 있는 교하교성  모습. 천혜의 요새였으나 옛 모습을 확인하기가 힘들다.

이처럼 실크로드의 여러 여행지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선 이 실크로드의 도시들은 유목민족인 흉노족을 비롯한 선비, 저, 갈, 강, 돌궐(투르크), 토번(티베트), 위구르 등과 한족이 중국 서북쪽의 신강위구르 자치구를 비롯한 감숙(甘肅,kansu)성 등 실크로드의 드넓은 땅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영토전쟁을 벌인 1000년이 넘는 영욕의 역사가 있고 또 그들 여러 민족이 세웠다 없어진 숱한 나라의 이야기가 사막의 황무지에 묻혀 있는 것이다. 

돈황의 막고굴도 꽤 오랫동안 굴입구를 봉쇄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그런 곳이다.

조선족 가이드 김정길은 약1백여년전 이곳 돈황 막고굴의 장경동에서 약5만점의 돈황문서가 발견됐고 대당서역기 등 1만 5천권의 문서를 영국이, 또 8천권의 서적을 프랑스의 '폴 펠리오' 등이 가져갔는데 오늘날 대영박물관에는 따로 돈황유물만 보관한 장소가 생길 정도였다고 들려주었다. 유럽의 문화재 약탈의 현장을 여기서도 생생히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여러 민족이 공존하면서 이 실크로드 길을 따라 상인들이 부(富)를 거머쥐려 했던 만큼 이들을 둘러싼 이야기도 많을 것이며 삼장법사와 같이 새로운 깨달음 또는 심오한 종교의 세계를 체득하려는 구도의 행렬 또한 이 실크로드를 거쳐 갔을 것이다. 

우리의 스님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이 실크로드가 있었기에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황무지와 오아시스가 교차하는, 천산산맥과 기련산맥의 만년설이 올려다 보이는 장엄한 땅이 있는 실크로드에 여러 민족이 서로 싸우고 때로는 공존하며 부를 쌓고 내세의 평안을 기원했던 땅이 실크로드였던 만큼 거기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이야기가 쌓여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 것이 이번 여행에서의 상념이었다. 

 실제로 우루무치에서 처음 갔던 신강역사박물관에는 신장위구르자치구에 살고 있는 12개 민족의 전시관이 있어 여러 민족이 살고 있는 것을 보았으며 그들의 특징을 보여주는 마네킹과 생활모습을 재현시켜 놓은 여러 생활도구와 의상이 제각각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화염산 쉼터에 있는 서유기 영화 간판(왼쪽 위). 서유기의 삼장법사를 비롯한  손오공등의 조형물이 서 있다(왼쪽 아래). 화염산 입구에 서있는 표지판 모습(오른쪽).

그런데 이 신강박물관에서 본 미이라 중 가장 인상깊은 것은 신장자치구의 오래된 묘에서 발견된 옛 사람의 미이라였는데 무려 3000여년 전의 사람이었고 ‘누란‘이라는 나라의 여자미이라를 비롯해 여러 구의 미이라가 옷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놀라운 것은 미이라의 형태가 뼈만 남아 있었지만, 그 오랜 세월 속에서도 형태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실크로드의 지역이 건조한 탓에 그 오랜 세월동안 미이라의 형태로 보존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 필자는 그저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 서역 땅의 역사가 우리에게 생소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만큼 멀리 떨어져 있어 우리와의 교류가 적었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중국의 시각에서 역사가 쓰여져 상대적으로 유목민족의 역사가 축소된 측면에서 기술되 었다는 점과 함께 진시황 때부터 중국과 겨뤄왔던 흉노인들에게는 문자가 없다는 점도 이들의 이야기가 사막에 묻혀 버리게 된 요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흉노를 비롯한 유목민족들은 그들의 오랜 유목생활과 수렵생활을 거치면서 많은 예술품과 노래뿐만 아니라 나름의 예술과 문명을 갖고 있었다는 게 문명연구자들의 지적이다. 

어쨌든 기원전 2세기부터 1천년이 훨씬 넘는 세월동안 실크로드에는 흉노를 비롯한 여러 유목민족들의 숱한 흥망성쇠와 한족의 진시황부터 위, 촉, 오의 삼국시대,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 남북조시대, 수, 당시대 등 유구한 왕조시대를 거쳐 오면서 이곳 실크로드에는 수많은 사연들이 곳곳에 어려 있는 그런 역사의 땅이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들을 수 있었다.

조성남 전 중도일보 주필
조성남 전 중도일보 주필

그런 점에서 김정길씨(조선족 가이드)는 훌륭한 이야기꾼이었다. 화염산에서 우루무치로 가는 버스 속에서 그는 ‘누란‘이라는 나라의 이야기를 했는데 누란족은 5000년의 역사를 5세기경 역사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이 누란왕국은 실크로드를 가려면 거쳐 갈 수 밖에 없는 땅이어서 이곳을 거쳐가는 상인들에게 많은 세금을 거두어 번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중국의 법현스님도 69세의 나이에 제자 1명만을 대동하고 이 오아시스국가를 방문했는데 인구가 5000명에 이르는 큰 나라였다는 것, 당시 중국의 한(漢)나라 장한성에 이 누란왕국의 왕자를 볼모로 보낼 정도로 이 나라는 강성했는데 그 후 선선왕국으로 바뀌었다가 실크로드의 물길이 바뀌면서 나라가 쇠퇴해 사라졌다고 한다. 

그런데 스웨덴의 탐험가가 이곳에 왔다가 우연히 이 누란왕국의 흔적을 발견했고 그 후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 호펜'이 실크로드(silk road)란 말을 사용하게 된 것이 실크로드의 출발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라진 누란왕국과 같은 마치 모래사막의 신기루 같은 사연이 잠겨있는 곳 그곳이 실크로드라면 지나친 역사의 과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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