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전 국무총리(JP)가 세상을 떠났다. 그에겐 늘 두 가지 호칭이 따라 붙었다. ‘2인자’와 ‘3김’이었다. 두 호칭 모두 당대 한국정치의 현실을 반영하는 이름이었다. 그는 5.16 쿠데타에 참여, 박정희 독재정권 탄생의 주역이면서도 결국엔 그 자신이 독재 정권의 견제를 받는 처지가 되면서 2인자의 덫에 갇혀 전반의 정치 인생을 보냈다. 이후 찾아온 민주화 시대에는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3김시대를 열었다.

그는 부여가 고향이고, 공주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는 육사에 들어가 박정희와 교류하면서 5.16 군사정변의 주체가 되었다. 그는 중앙정보부를 만들고 민주공화당 창당 작업을 주도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2인자가 되었다. 그러나 독재정권에서 2인자는 견제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당시 그의 ‘자의반 타의반’ 외유는 2인자의 처세술이었다.

그가 종종 주장한 맹자의 ‘무항산(無恒産) 무항심(無恒心)’은 5.16 쿠데타의 명분이었다. ‘먹고 살 수 있어야 민주주의도 있다’는 말은 종종 독재의 명분으로도 쓰인다. JP는 이를 신념으로 내걸고 박정희 정권을 탄생시킨 주역이지만 그 스스로도 독재정권의 견제 대상이었다. 박정희 독재정권이 이룬 경제적 부흥이 한국 민주화의 씨앗이 되었다면 JP의 공(功)도 인정해야 한다. 혹자들은 그에 대해 공칠과삼(功七過三)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3김시대는 지역주의 정치의 다른 이름이었다. JP는 충청을 텃밭으로 하는 신민주공화당을 만들어 13대 총선에서 35석을 얻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당시 군부 정권의 대통령이었던 노태우, 김영삼과 함께 당을 합치는 3당합당을 단행하였다. 이후 김영삼을 도와 그가 대통령이 되었으나 김종필은 쫓겨나는 처지가 되었다.

충청인들이 밀어주기도 하고 실망도 했던 충청 맹주

JP가 이런 처지가 될 때마다 충청도는 그를 응원해주었다. 1995년 지방선거에선 대전과 충남북지사를 비롯 시도지사 5명을 배출했고 다음해 총선에선 50석을 얻어 제3당의 위치까지 올랐다. 그러나 1997년 대선에서 김종필은 김대중과 단일화하면서 DJP 연합정권을 구성하였지만 결국은 갈라서야 했다. 한번은 영남 정권을, 또 한번은 호남정권을 밀어준 셈이지만 결국엔 쫓겨나는 신세였다.

JP는 두 김 씨와는 달리 내각제를 원했다. 그의 내각제 신념은 지역주의에서 나왔을 수도 있다. 내각제가 아니면 충청의 집권은 어렵다는 판단 때문일 수 있다. 그는 두 김 씨에게 내각제 약속을 받고 도와주곤 했지만 늘 허사였다. 정치인 JP의 한계였으나 기본적으로 우리 국민들에겐 내각제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JP는 YS DJ와는 달리 한국 정치사에 한 획을 긋는 정치의 주역은 해보지 못하고 말았다. 

민주화 시대 이후 대한민국은 변화와 개혁을 열망했다. 어쩌면 보수 정객 JP에겐 마땅한 시대적 소임이 없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한국의 현대 정치사에서 남긴 족적은 결코 작지 않다. 그는 분명 대한민국 산업화의 주역이었고, 3김시대에는 지역주의 속에서도 영호남 사이에서 균형추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는 3김시대에도 1등은 해보지 못했다. 

그가 충청도의 맹주로 있으면서도 충청도가 덕본 것은 없다. 화려한 경주에 비하면 부여와 공주는 초라하기 이를 데 없고, 그의 고향 부여를 잇는 도로가 가장 늦게 확장 공사가 실시된 점도 이를 말해준다. 쩨쩨하게 자기 지역의 이익이 챙기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했지만 충청인들에겐 서운한 부분이었다.

JP는 박식한 지식인이었으며, 시 서 화에 능한 예술가요 로맨티스트였다. 그는 또 뛰어난 아이디어맨이었고 기획가였다. 감귤이 흔치 않았을 때 제주도에 감귤 농장을 만들어 대중화시킨 사람은 JP였다고 한다. 그는 정치인 치고는 여러 분야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

누구에게나 공(功) 과(過)가 있기 마련이다. JP에게도 영욕과 명암이 있다.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평가가 엇갈리는 길을 걸어왔다. ‘5.16’이 그렇고 ‘3김시대’라는 말도 부정적 용어임이 분명하다. 그는 두 사건의 한 가운데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온전한 주역은 되어 보지 못했다. 충청도 사람들은 그런 그를 밀어주기도 했고 실망도 했다.

그의 빈소에 조문행렬이 이어 지고 있다. 대통령의 조문 여부는 미정이라고 한다. 단순히 정치적 의미라면 아쉬운 판단이다. JP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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