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영의 손 스피커] 자유시참변의 진실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대전모임 회원들이 지난 3월 홍범도 장군 묘역을 찾아 참배하고 있다.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대전모임 제공.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대전모임 회원들이 지난 3월 홍범도 장군 묘역을 찾아 참배하고 있다.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대전모임 제공.

“독립군 유인·학살 ‘자유시 참변’에 가담…모스크바 초청돼 레닌과 면담, 금화와 권총 선물 받아”

지난 2021년 8월 16일, 그러니까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카자흐스탄으로부터 한국으로 봉환된 다음 날 보수인터넷신문의 기사 제목이다.

이 기사에서 강규형 명지대 교수는 “홍범도는 독립운동을 분명 하기는 했는데, 자유시 참변 당시 독립군 몰살을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또 “이 공로로 레닌한테 돈도 받고 대우도 받지 않았나”라고 지적했다.

2년 전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국내로 봉환되었을 때 붙었던 논쟁은 2년이 지난 지금도 그치질 않는다. 홍범도의 좌익이념을 문제 삼는 이들은 일관되게 자유시참변과 이후 홍범도의 행적을 공격한다.

최근에는 국가보훈부 장관이 홍범도 장군에게 이중으로 훈장이 추서되었다며 이를 바로 잡겠다고 나서며 논란이 다시 불붙지 않을까 우려된다.

홍범도는 과연 독립군을 몰살한 빨갱이었나? 국내 봉환 2주년에 즈음해 그동안의 연구자료들을 참조해서 살펴보자.

그 첫 번째로 자유시참변이 일어난 배경에 대한 고찰이 필수적이다. 자유시 사변으로도 불리는 이 사건은 1921년 6월 28일 극동 공화국 아무르주 스보보드니(스보보드니는 ‘자유’를 뜻하는 러시아어)에서 독립군 무장투쟁 부대인 사할린부대가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에게 진압을 당하면서 다수가 죽은 사건을 말한다.

1919년 3.1운동으로 시작된 독립의 기운은 임시정부를 탄생시켰다. 1920년을 무장투쟁 원년으로 선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방침에 호응하여 간도와 만주지역 독립군 부대들은 본격적 대일항쟁을 전개했다.

그 결과 홍범도를 비롯한 무장독립군들은 6월 봉오동과 10월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파했다. 이에 일제는 무장 독립군을 없애기 위해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였다. 토벌작전은 독립군에 대한 군사적 행동뿐만이 아니라 간도참변과 같이 조선동포를 집단 학살하는 등 야만적으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독립군들은 식량 보급이 끊기고 무기의 수급도 어려워져 1920년 후반부터 러시아령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홍범도 장군도 부대원을 이끌고 흑룡강을 건너 극동공화국 이만에 들어갔다. 대규모 군대를 편성해 다시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서는 소비에트 정부와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홍범도 부대 외에도 자유시 일대에는 이만군대, 다반군대, 니항군대, 자유대대 등 연해주 출신 한인 빨치산 부대와 간도에서 온 최진동·안무군대 등의 독립군부대, 이청천 부대들이 집결해 있었다.

당시 볼세비키 정권은 혁명을 성공시켰지만 1차 세계대전과 적백내전의 상황 속에 극동지역을 완전 장악하지 못하자 1920년 4월 멘셰비키와 사회주의혁명당 등과 함께 극동공화국이라는 완충국가를 설립해 운용하던 상황이었다.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은 국경을 넘어 오는 독립군을 ‘정치적 이민자’로 규정하며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또 속속 모여들기 시작한 독립군들은 통합을 통해 조직을 재편하고 안정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주도권을 놓고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경쟁했다.

처음에는 러시아공산당 극동국 한인부를 통해 극동공화국 정부의 지지를 받고 있던 상해파가 주도했는데 전한군사위원회라는 한인부대 통합부대를 결성했다. 산하에 사할린부대(대한의용군)라 불리는 무장조직이 있었는데 그 수가 177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와 경쟁하는 이르쿠추크파는 한국민의회에 기반하였으며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후원 아래 자유대대(고려혁명군)라 불리는 무장조직을 운용했다.

홍범도 부대도 처음에는 상해파의 군사조직인 사할린부대(대한의용군)에 속했다가 고려혁명군으로 넘어갔다. 이는 양측의 균형이 무너지고 이루크츠크파가 우세를 점하게 된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오광영 전 대전시의원,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
오광영 전 대전시의원,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

홍범도 장군은 무장부대를 통합하기 위해 ‘혁명러시아 당국 및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의 권위’를 인정하고 ‘무기・식량 등의 원활한 공급’이라는 현실 문제까지 해결하는 목적으로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와중에 1921년 6월 28일 참변이 일어났다. 자유시에서 3마일 떨어진 수라세프카에 주둔한 사할린의용대를 러시아 적군과 한인보병 자유대대가 무장해제시키는 과정에서 양측간 충돌이 벌어진 것이다.

외견상으로는 무장해제 과정에서 일어난 돌발사고였지만 그 배경에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주도권파쟁이 불러온 독립운동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사망자 규모는 자료마다 매우 큰 차이가 있지만 포로는 900명 가량으로 엇비슷하다. ‘재로 고려혁명군대 연혁’에는 사망 36명, 행방불명 59명으로 기록되었다. ‘간도지방 한국 독립단의 성토문’에는 사망 및 익사 303명, 행방불명 250명으로 기록되었다. 사상자 규모를 떠나서 독립운동사에서 매우 불행한 사건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홍범도장군의 부대는 이 충돌에 관여하지 않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윤상원 전북대 사학과 교수가 2017년 발표한 논문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 사변’등에 따르면 ‘당시 홍범도는 장교들과 솔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하면서 매우 안타까워 했다’고 전해진다.

또 이 참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홍범도 장군이 고려혁명군사법원 재판위원으로 참여한 것 또한 비판의 대상이다. 그 자신에게는 인간적으로 곤란하고 불행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홍범도 장군이 악역을 맡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러시아당국이 그가 가진 독립군 내부의 지위를 활용해 사태를 수습하려는 시도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홍범도 장군은 이념형 지도자는 아니었다. 이념보다 조국해방운동이 우선이었던 그로서는 무장세력의 통합을 위해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 받은 독립군은 8명(징역 2년 3명, 징역 1년 5명) 뿐이었다.

조국해방 투쟁의 과정에서 홍범도 장군은 자신을 위해 그 어느 것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일생을 통해 증명되었다.

의병활동을 하던 시기에 연합부대를 만드는 과정에서 다른 부대장을 연합부대의 책임자로 추대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를 수행할 때도 다른 부대와 연합을 강력히 추진하여 전투력을 배가시키지 않았던가?

자유시에서도 오직 독립군부대의 통합과 재편을 통해 일본군과의 일전만 추구했던 홍범도를 마치 자유시참변의 책임자인 양 호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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