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 작가, 장편 역사소설 '장만' 상중하 3권 출간
비주류로 역사에 묻힌 '장만 장군' 철학과 활약상 재조명
중립·균형외교가 절실히 요구되는 현 시기...그의 국방 철학 주목

이계홍 작가가 새롭게 선보인 장편 역사소설  3편. 
이계홍 작가가 새롭게 선보인 장편 역사소설 3편. 

[세종=디트뉴스 이희택 기자] 이계홍 작가의 장편 역사소설 <장만> 3편(글로벌마인드 간행)이 최근 출간돼 독자 곁으로 간다.

그는 동아일보·문화일보 기자 출신으로 세종시에서 꾸준한 작품 활동을 선보여 왔다. 

이 책은 선조·광해·인조 시대 균형외교 설계자이자 군사 전략가로 일세를 풍미한 낙서(洛西) '장만(張晩) 장군'의 일대기를 그렸다. 

상권은 <장만-균형외교전쟁>, 중권은 <장만-인조반정>, 하권은 <장만-호란의 격랑 속으로> 스토리를 담았다. 

“이 시대 왜 장만 장군이어야 하나?”라는 화두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준다.

이계홍 작가는 “장만 장군은 조선조의 대표적 국방 전문가로서 임진왜란-정유재란-심하전투-이괄의 난-정묘호란(1627)-사후의 병자호란(1636)을 경고한 난세의 위기를 극복한 위인이다. 장군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축복”이라며 집필 계기를 설명했다. 

그는 “장만 장군은 조선·명나라·후금·일본의 동양 4국 각축전에서 중립외교와 균형외교를 설파한 장만 장군의 군사외교 철학을 오늘날의 현실에서 더욱 반추해볼 인물이다”라고 평가했다.

작가는 장만 장군을 깊이 이해하기 위한 역사적 배경부터 설명한다. 

주지하다시피 선조-광해-인조로 이어지는 조선조 중후반기는 이른바 ‘난세의 시기’였고, 선조대의 기축옥사(1589)를 기점으로 지식인 사회의 한 축이 무너져 국가적으로 좌절감이 팽배했다. 

 

3년이 지난 후 불행히도 임진왜란(1592)이라는 우리 민족 최대의 국난을 겪어야 했다. 이어서 정유재란(1597)으로 우리의 산하는 초토화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광해대에 인조반정(1623)이 일어나고, 인조대에 이르러서는 이괄의 난(1624)-정묘호란(1627)과 그의 사후 뒤이어 병자호란(1636)으로 이어지는 처절한 역사적 격랑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50년 가까이 조선은 외침(外侵)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신음해야 했다. 이때 무장으로 전장 최일선에서 맹활약한 장군이 바로 장만(1566-1629)이다.

 

그가 활동했던 시기는 선조-광해-인조, 즉 세 왕이 나라를 경영하던 시기로 어쩌면 조선이 한반도에서 사라질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했던 시기였다.

이계홍 작가가 장만 장군의 실체를 간파하게 된 것은 임진왜란·정유재란·이괄의 난 발발 당시 야전군 사령관(팔도부원수)으로 활약한 충무공 금남군 정충신 장군 이야기를 소설로 집필하면서다.

정충신 장군의 군인 정신은 바로 그의 스승이자 상관인 장만 장군에게서 물려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 장만 장군을 알게 된 작가는 장만 장군 관련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했다.

장만 장군은 병조판서, 형조판서, 팔도도원수, 팔도도체찰사, 팔도도원수를 지낸 조선조 최고의 문·무관으로서 단순히 싸움만 하는 장군이 아니었다.

무장에게서 보기 드문 시대를 꿰뚫어 보는 예지력과 통찰력을 지니고 있어서 국가 존립과 발전을 위한 균형·중립외교를 설파했다.

조선조·명나라·후금·일본 등 동북아 4국의 격변하는 전환기에 그가 주장하고 설파한 길을 따라갔다면 우리나라 역사의 물줄기는 상당 부분 달라졌을 것이라고 작가는 주장한다.

그의 사위 최명길과 김신국, 정충신, 남이흥, 이시백, 장유 등 당대 실천적 지성 인맥이 활동 영역을 확장했더라면, 우리나라 역사가 초라해지진 않았을 것이라는 게 저자가 이 역사소설을 쓰면서 절감한 교훈이다.

임진왜란 하면 이순신·권율 장군을 꼽으면서, 동시대에 활약한 장만 장군에 대해서는 그 평가가 박하다는 것이 장만을 연구한 학자들의 중론이다.

중·고교 국사 교과서에도 장만 장군에 대한 언급이 많지 않다. 이는 조선 시대 정치 및 인물 연구가 학문적 계보 중심이거나 문벌과 당쟁사 중심으로 엮인 영향 때문이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성리학적 예론에 충실한 문신이나 당파의 중심에 섰던 인물들을 주로 다룬 결과, 비당파적이자 비주류의 무계보인 그가 역사적 평가에서 소외된 측면이 있다고 작가는 지적한다.

한편으로는 장만 장군이 개혁파로서 비주류로 살아오다 보니 주류 사회에서 배척받은 측면이 없지 않았다고 봤다. 

실제 당시 성리학이 지배하는 국가 체제에서 개혁은 국가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곤 했다.

그 역시 문과 무를 겸비한 사대부로서의 한계가 분명 있었지만, 당대 꽉 막힌 나라에서 국방 개혁과 균형외교를 주장한 것은 획기적이었으나, 주류 사회에는 먹히지 않았다.

그래서 명나라 사대만을 주장하는 사대부에 반기를 든 비주류의 삶은 고단할 뿐이었다. 수구적 경쟁으로 체제를 이끌어가는 풍조였으니 나라를 개조하자거나 균형외교를 펼치자는 주장은 배척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계홍 작가는 “장만 장군의 개혁적 행적이 묻혀선 안 된다는 작가적 소명이 있었다”라며 “그는 문신의 신분이었지만 무인이 되어 현실에 맞는 국방 전략으로 국난 극복을 위해 헌신한 군사 전략가로서의 면모가 뚜렷했다”라고 밝힌다.

작가가 장만 장군에 빠져든 것은 현실묵수적이거나 체제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현실타파적 개혁정신이 중심이 되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계홍 작가가 본 '장만 장군'> 

 

이계홍 작가
이계홍 작가

동시에 임금이 된 광해가 전쟁 후유증을 수습하지 않고, 무리한 궁궐 공사 진행과 미신에 의존한 국사 운영, 계모 인목대비를 폐서인(廢庶人)하고, 그 어린 아들 영창대군과 형제들을 죽이는 패덕을 자행하자 19차례나 상소문을 올려 부당함을 지적한 인물이다.

임금의 스승이었지만, 사사로운 사제지정(師弟之情)의 관계를 버리고 시대의 양심으로서 소명을 다했다.

장만 장군의 무장으로서의 행적은 이순신 장군이나 권율 장군 못지않다고 평가되나 그의 국방철학과 업적이 묻힌 것은 위와 같은 양심적 행적 때문이었다고 본다.

그래서 조선조가 멸망할 때까지 그는 사위 최명길, 수하 무장 정충신, 남이흥과 함께 역사에서 소외되는 불운을 겪었다.

그런데 오늘날 중립·균형외교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에 그가 소환되었다. 새삼 그의 국방철학을 음미해볼 때다.


아래는 이계홍 작가 약력 및 주요 저서.

전남 무안 출생, 동국대 국문학과 졸업, 동대학원 석사 졸업, 동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1974 월간문학 신인상 소설부문 당선으로 문단 데뷔

<언론사>

동아일보 문화부기자 및 문화부차장, 문화일보 문화부장 특집부장, 서울신문 수석편집부국장 논설위원 통일문제연구소장(국장급), 세종포스트 주필

<강단 및 일반>

서울여대 강사(사고와 표현, 인간과 문학), 용인대 겸임교수(언어와 문학), 동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객원교수(매스컴문장연습, 고급기사작성법),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기획조정팀 전문위원

<창작집>

소설집 틈만 ‘나면 자살하는 남자’(1992.책나라),중편집 ‘비껴앉은 남자’(1993.신원문화사),소설집 ‘밑천’(1994.문학아카데미), 장편소설 ‘초록빛 파도’(1994.아사달의 꽃), 소설집 ‘서울 노마드’(2016.문학나무), 대하 역사소설(5권) ‘깃발-충무공 금남군 정충신’(2020. 범우사), 역사소설 ‘불타는 나라’(2020,8-2021,12 인터넷 매체 오피니언타임스 연재), 대하 장편소설(4권) ‘고독한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2022. 범우사)

<인물평전>

‘이계홍의 휴먼스토리’(2004.모아드림· ‘신동아’ 연재 ‘이 사람의 삶’을 묶은 인터뷰집), 인물전기 ‘장군이 된 이등병 최갑석’(2005.화남출판사·국방일보 연재물 이등병이 장군이 된 최갑석 이야기), 인물전기 ‘빨간 마후라 하늘에 등불 켜고’(2006.6 이미지북․ 국방일보 연재물. 전공군참모총장 장지량 장군 이야기), 인물전기 ‘역사를 넘어 시대를 넘어’-전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장군 전기(2007.1-10 국방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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