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톡톡: 백 마흔일곱번째 이야기] 명복만 빌고 있을 순 없다

자료사진. 대통령실 제공.
자료사진. 대통령실 제공.

길 가던 사람들이 죽었다. 하늘이 무너진 것도, 땅이 꺼진 것도 아닌데 15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참변을 당했다. 생때같은 젊은이들이 눌리고 깔려 목숨을 잃었다. 

안타까운 죽음에는 안타까운 사연이 따라다닌다. 오랜만에 만난 고향 친구들, 군대에서 휴가 나온 막내, 정규직 전환에 성공한 딸. 그들은 그날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그들의 가족은 하룻밤 새 ‘유가족’이 됐다. 

정부는 5일까지 ‘국가 애도 기간’으로 정했다. 원인 규명보다 애도가 먼저인 게 얼마나 진정성이 있을까. 그래도 온 국민은 고인들을 애도하며 명복을 빌었다. 정치권도 싸움을 멈췄다. 바람 잘 날 없는 국회가 참사 앞에 잠잠해졌다. 얼마 안 가 도루묵이 되고 말겠지만. 

보라, 참사 직후 지금까지 “내 잘못이다, 책임지겠다”라는 정치인과 관료가 있는지. “인력을 미리 배치해 해결할 문제는 아니었다”라는 소리나 늘어놓는 인사가 재난관리 주무장관이고, 외신 회견에서 웃으며 농담이나 하는 자가 총리인 나라다. 

그러니 힘없는 국민만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넘어진다. 떨어져 죽고, 끼여 죽고, 깔려 죽는 건 노동자만이 아니다. ‘사회적 참사’의 본류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맨 꼭대기에는 정치와 권력이 웅크리고 있다. 그들은 꼭 사고가 터진 다음 존재를 드러낸다. 대신, 진정한 사과나 책임지려는 자세는 없다. 법과 제도가 항상 사고를 뒤따라갈 수밖에 없는 구조적 이유다. 

이번 참사의 책임은 국민도, 희생자도, 일선 경찰도 아니다. 사회적 참사 책임의 주체는 ‘국가’에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8월 폭우 참사가 일어났을 때 “국민의 안전에 국가는 무한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예상보다 더 최악을 염두에 두고 대응해야 한다”라고도 했다. 

대통령 말대로라면, 수많은 인파가 몰릴 걸로 예상했던 현장에 ‘최악의 사태’를 대비한 조처를 해야 옳았다.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았고, 참사는 또 일어났다. 그러면서 ‘정치적 해석보다 애도가 먼저’라고 한다. 정쟁을 자제하는 것과 참사 원인과 책임을 규명하는 건 구분해야 한다. 

신형철 서울대 교수는 최근 출간한《인생의 역사》에서 죽음을 세는 방법을 설명했다. 언젠가 기타노 다케시는 말했다. “5천 명이 죽었다는 것을 ‘5천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서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천 건 일어났다.’가 맞다.” (중략) 덕분에 나는 비로소 ‘죽음을 세는 법’을 알게 됐다. 죽음을 셀 줄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애도의 출발이라는 것도. 

기간을 정해 두고 같은 모양의 리본을 달도록 하는 것이 애도인가. 죽음의 수를 낱낱이 헤아리고, 그 무게를 온전히 짊어지려는 자세가 진정한 애도 아닐까? 정치가 실망스럽다고 외면하고 방치하면 주권자로서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다. 그 무관심이 사회를 퇴보시키고, 개개인의 삶도 피폐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음을 셀 줄 모르는 정치권력에 묻고 따져야 한다. 그래서 책임 있는 지도자가 우리 사회를 이끌 수 있도록 ‘연대’해야 한다.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넘어져 명복만 빌고 있지 않으려면.

저작권자 © 디트NEWS24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