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재민의 정치레이더 55] 지방분권과 행정수도의 꿈을 잇다

“한계에 부딪힌 수도권 집중 억제와 낙후된 지역경제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 충청권에 행정수도를 건설하겠습니다. 청와대와 중앙 부처부터 옮겨가겠습니다.”

2002년 9월 30일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대통령 후보가 여의도 당사 앞에서 열린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출범식’ 연설에서 한 약속입니다.

노 후보는 “수도권 집중과 비대화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 국가적 결단이 필요하다”며 “청와대 일원과 북악산 일대를 서울시민에게 되돌려줌으로써 서울 강북지역의 발전에 새 전기를 마련하겠다”고 했습니다. 충청권과 서울시민 양쪽을 모두 생각한 겁니다.

그해 12월 노 후보는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이 됐습니다. 그리고 국민과 충청권에 약속했던 행정수도 건설에 나섰습니다. 그 역사적인 장소가 바로 ‘세종시’입니다.

당초 노 전 대통령은 서울을 충청도로 옮기는 수도(首都) 이전을 추진했습니다. 서울과 수도권 주민들, 야당은 ‘결사반대’했죠. 결국 헌법소원까지 했는데요. 헌법재판소는 2004년 수도 이전이 ‘위헌’이라고 판결했습니다. 그렇게 노 대통령의 수도 이전의 꿈은 백지화 됩니다.

그래서 추진한 게 행정기관을 세종시로 옮기는 행정수도 이전입니다. 서울이 포화상태이기 때문에 지방으로 행정수도를 내려 보내 지방분권과 국가 균형발전을 이루려고 했던 것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노 전 대통령 다음에 정권을 잡은 이명박 전 대통령은 전혀 다른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직도 충청도민 기억 속에 오롯이 새겨진 이름, ‘세종시 수정안’.

이 전 대통령은 국회와 청와대가 서울에 있는 상태에서 행정기관이 세종시로 가면, ‘행정적 분단’을 초래한다는 주장을 수정안 근거로 내놨습니다. 그것도 충청도 출신인 정운찬 총리를 앞세워서요. 서울시장 출신이라서 그랬던 걸까요.

어디 그뿐입니까. 수도권 규제완화 정책은 어땠습니까. 수도권 규제가 풀리자 지방으로 내려왔던 기업들은 서울로 유턴했고, 수도권은 배를 불렸지요. 반대급부로 지방도시는 황폐화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 전 대통령에게 바통을 넘겨받은 박근혜 전 대통령마저 이 정책을 고수하면서 지방은 그야말로 ‘말살’ 지경에 처했습니다.

‘이명박근혜’ 정권의 반(反) 지방정책에 ‘인서울’ 쏠림 현상은 보다 심해졌지요. 지방분권과 균형발전을 그리던 ‘노무현의 꿈’은 일장춘몽으로 끝나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요. 문재인 대통령은 달랐습니다. 10년 넘게 잠들어 있던 지방분권의 핵심인 행정수도를 흔들어 깨우고 있습니다. 어제(24일)부터 행정안전부가 세종시 이전을 시작했고요. 올해 8월에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도 합류합니다. 정부 부처가 하나 둘씩 세종시에 안착하면서 행정수도로서 면모를 갖추고 있는 셈입니다.

최근에는 대통령집무실을 세종시로 옮겨야 한다는 여론이 있는데요. 이건 좀 시간을 갖고 진행할 일입니다. 문 대통령 대선 공약이던 ‘광화문 집무실’이 사실상 무산된 상태인데요. 당장 세종시에 대통령 집무실을 설치한다면 ‘인서울’과 야당이 순순히 있을까요? 과거 노 전 대통령 때 마냥 “결사반대”를 외치겠죠. “광화문 시대 공약은 결국 수도를 이전하려는 속셈이었군” 하면서요.

그러니 문 대통령 입장에선 여론이 무르익을 때까지 시간을 두려고 할 겁니다. 문 대통령은 지난 22일 국무회의에서 장관들이 세종시에서 근무시간을 늘리고, 서울과 세종을 오가는 시간을 절약하는 차원에서 영상회의 활용도를 높이라고도 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향후 대통령 세종집무실 설치에 좋은 명분이 될지 모릅니다.

가령 장관들의 세종시 근무일과 영상회의 활용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대통령은 ‘영상회의도 잘 하지 않고, 장관들도 세종시에 가지 않으려하니, 아예 대통령집무실을 세종에 두어야겠습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영상회의 활용률이 높으면 어떨까요. ‘집무실이 세종에 있어도 회의가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는 거죠. 대통령 세종집무실이 생기면 국회 분원은 자동으로 따라올 겁니다.

대통령이 세종집무실 설치 명분을 찾는 동안 지역 정치권과 언론은 열심히 군불을 지펴야 합니다. 지역 여권이 모처럼 힘을 합쳐 대통령 세종집무실 설치 공동청원서를 채택한 것도 반가운 일입니다. 그것이 비록 내년 총선을 겨냥한 민주당의 정치적 액션일지라도, 공약으로 만들어 관철시키는 건 충청도민들 몫일 겁니다.

국민투표에 부치진 못했지만 지난해 문 대통령이 만든 개헌안을 보면요. 총강에 수도조항을 신설했습니다. 수도에 관한 사항을 법률로 정하도록 해 국가기능 분산이나 수도이전 필요성에 대비하도록 한 건데요.

노무현 정부 당시 헌법재판소가 "서울이 수도"라는 관습헌법을 들어 행정수도 이전의 근거였던 신행정수도 특별법을 위헌이라고 한데 따른 조치로 보입니다. 일부에선 “왜 수도 조항에 세종시를 못 박지 않았느냐”고 지적했는데요. 이 역시 서울과 수도권 여론이 악화될 것을 의식한 문 대통령 ‘빅 픽처’였을 겁니다.

세종시를 수도 조항에 적시하지 않은 게 문 대통령의 빅 픽처라는 근거는 지방분권을 강조한 부분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문 대통령은 개헌안 제1조(3항)에 “대한민국은 지방분권 국가를 지향한다”는 조항을 넣었습니다. 이는 ‘지방분권’이 서울과 지방의 대결구도가 아닌, 대한민국의 미래라고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서울과 지방 사람들이 서로 싸우지 않고 국가 균형발전을 이루려는 문 대통령의 ‘중재’가 담긴 걸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또 넓게는 남북통일 이후 상황까지 감안한 것이 아닐까 짐작됩니다.

이처럼 ‘노무현 표’ 세종시는 10년이란 지난한 세월을 건너 ‘문재인 표’ 세종시로 계승‧발전하는 모양새입니다. 오래 전 뜬 첫술에 충청권은 꽤 긴 시간 허기를 참아왔습니다. 이제 충청권도 주린 배를 채울 때가 왔습니다. 콩 한쪽도 나눠먹으면 사이가 돈독해진답니다. 더불어 잘 사는 세상,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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