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남의 고전 인문학]

김충남 강사.
김충남 강사.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길을 인생이라 하지요. 그 길이 어떤 길인가 ‘만경연파수첩산(萬頃煙波數疊山)’이라. 자욱한 안개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망망대해처럼 구만리 우리네 인생길도 한 치 앞을 알 수 없지요. 저 산 넘으면 푸른 들판인가 했더니 산 너머 첩첩 산처럼 인생사의 한고비를 넘겼는가 했더니 고비고비 인생사가 끝이 없지요. 그래서 인생을 고통의 바다, 고해(苦海)라고 했나요.

우리 인간들이 삶의 최고 가치를 행복으로 삼고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를 평생 화두로 삼는 것은 고해 인생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아닐까요.

그래서 인생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고해 인생을 살아내는 것이라 했습니다.

하늘은 녹(祿)없는 사람을 낳지 않는다(天不生無祿之人) 했지요.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자기가 먹고살 복록은 가지고 태어난다는 겁니다. 福(복복)자를 파자해 보면 ‘신(示)은 한 사람(一口)마다 밭(田)을 주셨다. ’즉 조물주께서 인간을 이 세상에 내려보낼 때 각자마다 살아갈 복록을 다 주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 분들은 자식을 아무리 많이 낳아도 ‘걱정마라 제 먹을 밥그릇은 다 가지고 나왔으니까’라 했지요. 누구나 고해의 인생이지만 극복하며 살아갈 저마다의 복은 다 있는 것이지요.

고해의 인생, 어떻게 극복하며 살아야 할까 하는 겁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나올 때 조물주로부터 받은 각자의 복 그릇의 크기는 다 다르지요. 어떤 사람은 냉면 대접만 한 큰 그릇을 받고 어떤 사람은 간장 종자기 만한 작은 그릇을 받지요. 불공평하지만 조물주의 소관이기에 인간으로서는 싫든 좋든 무조건 받아야 하는 불가항력이지요. 인간으로서는 그저 자기 복 그릇을 충실히 채워 나갈 뿐입니다. 조물주가 주신 자기의 복 그릇을 채워가는 것, 이것이 인생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마다 다 달라서 자기 복 그릇에 만족하고 충실히 채워가는 사람, 복 그릇이 작다고 깨버리고 더 큰 그릇을 가지려는 사람, 큰 그릇을 받았으나 채우지 못하는 사람, 이처럼 천차만별이지요. 성공과 실패는 조물주로부터 받은 복 그릇의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복 그릇을 얼마나 충실하게 채워 나가느냐에 달렸지요.

잘 나가 던 어느 중소기업체 사장은 우연히 카지노에 갔다가 중독이 되어 사업체를 잃고 신용불량자가 되었으니, 자신의 큰 복 그릇을 채우지 못한 경우요. 어느 회사원은 일확천금을 노리고 주식에 승부를 걸었다가 직장까지 잃고 망했으니, 자신의 복 그릇이 작다고 깨버린 경우이지요. 임시직인 은행운전기사에서 은행지점장이 된 사람이 있었지요. 그는 은행원의 꿈을 안고 운전기사를 하면서 야간대학에 다녔고 각종 자격증을 따는 등 주경야독 끝에 꿈에 그리던 정규직원이 되었지요. 정규직원이 된 그는 남다른 고객관리로 실적을 쌓아 드디어 지점장까지 올라갔으니 비록 작은 복 그릇 이지만 충실히 채워 성공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성공과 실패는 복 그릇의 크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복 그릇에 얼마나 충실했느냐에 달려 있다하겠습니다.

조물주가 주신 복 그릇을 우리는 분수라고 하지요. 조물주가 주신 자기 복 그릇의 크기는 알 수 없듯이 자기 분수는 누구도 모르지요. 운전기사가 노력과 능력으로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지점장까지 올라간 것처럼 미지의 복 그릇을 차곡차곡 채워 나가는 것 이것이 고해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는 길 아닐까요.

욕심은 인생의 활력소입니다. 문제는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 즉 탐욕이지요. 주식투자로 일확천금의 탐욕을 부리다 망한 회사원처럼, 탐욕은 화를 부르지요. 그래서 옛글에서는 ‘내 분수 안에 있는 것을 구하려 하면 자기분수에 만족할 수 있지만 분수 밖에 있는 것을 구하려 하면 어찌 화를 초래하지 않겠느냐’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높고 먼 데 있지 않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 지금의 시간에 충실하십시오. 그리하다 보면 어느덧 나의 복 그릇이 채워져 고해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 수 있지요. 

저작권자 © 디트NEWS24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