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득이심리상담센터 박경은 철학박사(심리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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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적 어린아이가 어느 누군가의 부모가 되어 있다면 그 자녀와 배우자의 삶은 어떠하겠는가? 예전의 어르신들은 그것을 ‘팔자’라고 했다. 그러나 내가 보는 관점은 다르다. 자녀는 부모를 선택할 수 없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자녀가 부모를 선택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본론으로 와서 그것이 사랑이든, 물질이든, 계약이든 간에 어떠한 이유로 배우자를 선택했고,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한 일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책임이 한쪽이 아니라 양쪽 모두에게 있다. 그래서 우리가 부부의 연을 맺으면 서로가 배려하고 양보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예전에는 배우자를 선택함에 있어서 선택이란 것도 없고, 결정되어 진 삶을 살아내야만 했다. 너무 가난해서 결혼을 빙자하여 팔려가기도 했다. 이런 삶이 과연 얼마나 자유로울 수가 있었을까? 타율적인 삶 가운데 자율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모순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급속하게 시대의 흐름은 바뀌었고, 지금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타율적으로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다. 오히려 선택하는 것이 불편해서 선택장애를 지닌 사람도 의외로 많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자율적이지 못하고 타율적일까? 여기에는 책임과 의존성이 숨어있다. 이것을 알게 된다면 인간을 조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자율과 타율에는 책임이라는 큰 관문이 있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그만큼 두려움과 맞서야 하며, 자신의 이득을 먼저 생각해서는 안 되며, 때론 낭떠러지 끝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을 종종 경험해야 한다. 또한 책임을 진다는 것은 어린아이가 아닌 적어도 스스로가 성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혜택일 수도 있다. 특별한 혜택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유가 따르기 때문이다. 즉 ‘자유롭다’는 것은 책임지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자신이 타율적이라면 책임회피를 잘할 것이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타인의 원망하는 삶을 영위하게 될 것이다. 또한 타율에는 의존을 덩달아 데리고 다닌다. 마치 혹부리영감처럼 혹 떼려다가 혹을 하나 더 달게 되는 격과 같다. 의존할 대상이 있다면 이 또한 축복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의존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누군가는 자신을 더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희생을 자초할 수도 있지만, 희생을 강요당하기도 한다. 흔히 희생을 자초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즉, 양면성을 보지 못하는 것도 타율적이기 때문이다. 

타율 속에 가장 큰 괴물이 숨어있다. 그것은 공격성이다. 소심한 사람에게는 소극적 공격성이 있고, 활동적인 사람에게는 적극적 공격성이 있다. 이 공격성은 다른 사람의 삶까지도 파괴해 버리는 괴력이 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괴물’이라고 말한다. 과장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작은 괴력도 공격성이고, 큰 괴력도 공격성이다. 공격성이 존재한다는 자체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공격성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지인, 타인까지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공격성 안에는 긍정과 부정의 힘이 함께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율적인 삶에 익숙해 그 속에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다면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키워야 하며 순종하는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한다. 감사와 순종하는 마음마저 만들지 않는다면 철학자 볼테르가 말했듯이 깨달음이 있을 때까지 온갖 불행을 겪을지도 모른다. 깨달음도 스스로 의지가 있어야 하며, 익숙함에 속지 않으려면 늘 깨어있어야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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