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문기 변호사의 법률톡톡]

송문기 변호사.
송문기 변호사.

필자는 종종 의뢰인들에게 ‘법이 왜 그러냐. 억울하다.’라는 말을 듣는다. 때로는 법조인 개인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법률 그 자체가 글러먹은 것이 아니냐며 입법된 규정 그 자체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법률은, 1+1=2라는 수학의 공리라거나, 열역학처럼 물리학의 법칙이라거나, 십계명처럼 신神께서 하명하였다는 사정으로 신성하고 만고불변인 정언定言명령이라고 볼 수는 없다.

법률이 영원불멸의 진리였다면 국회에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법률이 제정·개정될 리도 없고,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문언 내에서) 법률의 해석을 변경할 리도 없을 것이며, 헌법재판소에서 위헌법률심판을 통하여 법률의 위헌성을 확인하고 효력을 배제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즉 법률과 사법제도는 진리가 아니라, 주권자들인 국민들이 사회의 각종 분쟁에 대비하고 사회를 유지하기 위하여 미리 해결기준과 제도적 절차를 정해둔 규범이다.

그런 법률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법률이 진리라서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주권자인 국민이 그들의 대표인 국회의원들을 통하여 사회구성원 전체를 위해 스스로 만들고(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 원리) 스스로 구속(민주주의의 자기구속성)하기로 정한 규범이므로 지켜야 하는 것이고, 사법절차 제도에 따라 최종적으로 도출된 결론에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승복할 줄 알아야 사회가 유지되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율사들이 헌법과 법률 및 판례와 양심에 따라 고민 끝에 결론을 내린다고 하여도, 신이 아닌 사람들의 판단인 이상 오심 가능성이 없을 수는 없다는 점(1. 이러한 오심가능성은 한국 근현대사의 군부 독재정권 치하에서 벌어진 사법살인이라는 역사적 경험과 더불어 사형제의 존폐논란에서 늘 제기되는 쟁점이다. 2. 이와 같은 점을 고려하면 변호인은 형사소송절차에서 여론의 눈치를 볼 것이 아니라 오롯이 피고인만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을 생각하면, 법률과 사법제도는 진리는 아니지만 우리가 존중하고 지켜야 하는 규범이라고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이지만, 제도와 규범은 결국 예상되는 분쟁사안을 해결하고 사회를 유지하기 위하여 미리 마련된 기준이므로, 구체적인 상황에서는 억울한 사람들이 일부 생길 수도 있다.

예컨대 3심 제도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 번 더 재판을 받아보고 싶다고 억울하다고 외치는 이들이 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원하는 재판 결과가 나올 때까지 4심이고 5심이고 재판을 반복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결국 사회는, 최대 3심을 거쳐 쌍방이 충분히 다투었으면 그 결과로 나온 판결에 승복하라고 사법절차를 3심제도에 의하도록 규범으로 미리 정한 것이다.(따라서 그만큼 제한된 3심제 내에서 권리구제를 받기 위해서 사건의 초기부터 법률전문가의 조력이 매우 필요하다.)

다만 법률이 미리 문언文言으로 기준을 정해두고 이를 각 사건에 관하여 법원이 해석·적용하여 구체적 의미를 밝힌 결과(즉, 판결·판례判例)에 승복하여야 함을 전제로 하더라도, 법률에 정해진 문언과 판례로 밝혀진 해석에 엄밀한 근거가 있는지는 늘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는 있다. 이하는 필자가 독자들에게도 한 번 고민해보기를 권하는 쟁점들이다.

1. (자살과 자살미수) 자살은 자기 자신을 죽인 것이지 타인을 살인하여 타인의 생명을 침해한 것은 아니니까 자살은 정당한 행위라고 볼 수도 있고, 자살에 성공하여 이미 죽은 자를 처벌할 가능성 자체가 없으므로 자살은 위법한 행위지만 처벌하는 규정이 없을 뿐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면 자살미수에 관해서 우리 형법상 처벌규정이 없는 것은 자살에 실패한 미수범도 정당하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아니면 자살미수범을 처벌하는 것은 도리어 확고한 자살시도를 유발할 수 있는 등 형사정책적 측면에서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자살미수범은 위법하지만 처벌 규정을 두지 않을 뿐일까?

2. (자살방조) 자살미수는 처벌하지 않으면서도, 왜 타인의 자살을 돕는 ‘자살방조’는 위법하다고 보아 처벌하는 규정이 있을까? 진지한 고민 끝에 자살을 시도한 자를 타인이 도와주는 자살방조행위도 위법하다고 처벌해야만 할까? 자살방조가 독립적 범죄라는 공범종속성설(통설)에 관한 논점은 별개로 하고 고민해보자.

3. (존엄사와 신체포기) 자기 자신에 대한 연명치료를 중단하겠다고 스스로 밝히는 존엄사도 자살로 보아야 할까? 자기가 자신의 생명과 신체를 처분할 수 없다면 그것도 개인의 자유에 대한 심대한 침해가 아닐까? 만약 자신의 생명에 대한 처분(자살)이 위법하지 않다고 가정하면, 마땅히 신체에 대한 처분(매매, 신체포기, 상해용인 등)도 위법하지 않다고 볼 여지가 있는 것인데, 그렇다면 자기가 자기 신체의 장기를 스스로 팔아넘긴다든지 자기가 자기 스스로의 존엄성을 포기(기본적 인권의 불가양不可讓 원칙의 위배)하는 것도 가능할까?

4. (생명과 낙태) 생명의 시기始期는 무엇으로 보아야 할까? 낙태죄에 관하여 세계 각국이 다르게 보는 여러 기준들처럼 생후 몇 ‘주’를 기준으로 태아를 독립된 생명의 개체로 보는 것은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가톨릭과 개신교를 비롯한 종교계의 의견대로 남자의 정자와 여성의 난자가 수정되고 착상된 이상 그 순간부터 생명으로 보아 낙태를 반대하여야 하는가?

5. (죽음의 기준) 생명의 종기終期는 무엇으로 보아야 할까?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한바 있는데 그렇다면 사람이 의식을 회복할 수 없는 뇌사를 사람이 죽었다고 판단하는 기준(몇몇 서구권 국가들의 기준)으로 해야할까? 아니면 신체기관의 영구적인 정지를 기준으로 보기 위하여 그에 가장 밀접한 심장박동의 정지(우리 형법에서 살인죄의 기준)를 사람이 죽었다고 판단하는 기준으로 해야할까?

6. (기준을 정하는 자) 결국 제시된 기준이 과학적 진리가 아니라면 그 기준은 어떻게 결정해야 하는가? 그 사회의 구성원 다수의 합의(여론)나 실정법으로 정하는 기준에 의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예컨대 나치가 유태인들을 학살한 케이스에서 이에 의문을 품지 않은 도구적 지성의 행정관료들은 무죄인가? 아니면 프랑스 혁명과 여러 현대 국가들의 헌법이 규정하는 기본적 인권의 불가침·불가양 및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한 자연법에 의거하여 이들도 유죄로 규정되어야 하는가?

<법무법인 재유(대전분사무소) 송문기 변호사>

*연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대전광역시 교육청 지방공무원 인사위원회 위원(현)
*세종특별자치시 교육청 규제완화위원회 위원(현)
*대전광역시 유성구 인사위원회 위원(현)
*대한변호사협회 변호사실무수습 제도개선TF 위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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