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톡톡: 백 일흔한번째 이야기] 조사 하나, 단어 하나에 신중해야

대통령실 제공.
대통령실 제공.

말 한마디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말 한마디로 천 냥 빚 갚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그만큼 말이 가진 힘이 크다는 얘기일 터. 조직의 수장이나 지도자에게 말이란, 그 정도와 깊이에 있어 상당한 위력과 영향력을 행사한다. 

고려 장수 서희는 탁월한 외교관이자 전략가이며, 정치인으로 유명하다. 그는 대군을 이끌고 침입한 거란 장수 소손녕과 담판을 벌여 누란지세의 나라와 영토를 지켜냈다. 그의 언변과 인품에 감탄한 소손녕이 맞절을 한 뒤 마주 앉았다는 일화는 협상 외교의 효시로 평가받는다.

국정을 총괄하는 대통령의 언어 역시 철저하게 관리된다. 국무회의를 비롯한 주요 회의부터 국경일 기념사나 연설문이 그렇다. 대통령의 연설문은 시작 직전 기자들에게 전달된다. 대통령실은 행사 종료 후 원문과 달라진 곳이 있으면 수정본을 보낸다. 토씨 하나 잘못이 있어도 바로 잡아 알린다. 왜 그렇겠나. 

대통령의 말은 곧 ‘국격’이기 때문이다. 국가 지도자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온전히 기록으로 남는다. 조사 하나, 단어 하나라도 신중해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방미(訪美) 전 외신과 한 인터뷰가 또 한 번 논란을 샀다. “일본이 100년 전 역사 때문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생각은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한 부분이 발단이었다. 

여기서 ‘받아들일 수 없다’라는 말의 주어가 더불어민주당은 ‘윤 대통령’이라고 주장했고, 국민의힘은 외신 보도의 ‘오역’이라고 잡아뗐다. 인터뷰했던 기자가 발언 원문을 공개하면서 상황은 끝났다. 해당 문장의 주어는 ‘저는’, 즉 윤 대통령 자신이었다. 그제야 국민의힘은 사실관계 확인에 미흡했다고 잘못을 인정했다. 

오죽하면 홍준표 대구시장마저 정부 여당을 향해 “방어하는 여당의 논리도 궁색하기 이를 데 없다”며 “정공법으로 국민에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게 좋지 않을까”라고 했을까. (지난 26일 페이스북)

윤 대통령은 지난해 9월 미국 방문 때도 욕설·비속어 논란을 일으켰다. 전 국민이 ‘듣기평가’를 겸한 청력을 테스트했다. 대통령실은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라고 해명했지만, 그 과정은 누가 봐도 어설펐다.

말이라는 게 그렇다. 해명이 거듭되면 변명처럼 들리고, 변명이 계속되면 ‘거짓말’로 들리기 마련이다. 정치 지도자의 실언과 설화(舌禍)는 국민 신뢰를 잃는 ‘독약’과 다름없다. 그래서 말의 무게는 물질로 따질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강원국 작가는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연설비서관을 지냈다. 그는 『대통령의 글쓰기』란 책에서 김 전 대통령 말을 인용해 이렇게 썼다. “상대가 내 말을 못 알아들을 때는 그를 탓하지 말고, 내 표현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어렵게 말한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은 말 잘하는 대통령까진 바라지 않을 거다. 말을 잘못했을 때 솔직히 인정하고, 사과할 줄 아는 지도자를 더 원하지 않을까. 천 냥 빚은 고사하고, 국격과 국력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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