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연의 힐링에세이]

가득이심리상담센터 박미연 철학박사(심리학 전공)
가득이심리상담센터 박미연 철학박사(심리학 전공)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면 원인(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그에 따른 결과만을 가지고 분노한다. 그렇다면 왜 분노할까? 시간이 흐르면 자신의 잘못이 희미해지거나 시간이 흐르면 용서가 되거나 잊어주길 바라는 마음을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일 것이다. 또한 그 관계가 유지될 것이라는 자신의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대상 항상성’과 같은 원리다.

우리는 언제까지 어린아이의 옷을 입고 있을 것인가? ‘심리적으로는 죽을 때까지 아이로 남아 있다.’란 말의 의미는 성숙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옷이 내 몸에 맞지 않으면 적어도 그 옷을 벗으려고 흉내 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와 같은 어른’으로 자리매김을 하는 것은 부모에게서 자신을 분리하지 못하고 부모가 그들에게 행사하는 권력으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함정이 함정임을 알고, 안전한 곳이 불안정함을 알았을 때가 진정한 안전을 찾을 때가 아닐까 한다. 안전하다고 믿었는데 안전하지 않음을 경험할 때 분노와 함께 불안을 동반한다. 결국 분노와 불안은 냉혹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스스로 선택한 결과물이다. 삶의 안정감이란 어쩌면 역설적이긴 하지만 안전한 곳이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안전하고 익숙한 것에 집착하고 의존한다. 그리고 어린아이 같은 행동을 하며 어른의 목소리로 징징댄다. 그것은 자신의 욕구를 넘어선 과욕이며 탐욕이다. 그러니 분노할 수밖에 없다.

현실적인 사람들은 전능감을 잊고 살아간다. 그러나 비현실적인 사람들은 아직도 전능감이 유효한 것처럼 살아간다. 마치 어린아이가 모빌을 보면서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모빌이 빙빙 돌아준다고 믿는 것처럼 말이다. 옆에서 엄마가 모빌을 돌려주거나 기계 작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때 충분한 상상에 만족하지 못한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순간순간 전능감을 발휘한다. 그것은 자신이 믿고 있는 믿음에 대한 배신이다. 그래서 분노하는 것이다.

그 분노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먼저 ‘자신’이 원인 제공자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정한다면 그것에 따른 책임을 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책임을 지는 것은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지거나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혔다면 진심 어린 사과를 하는 방법이다. 만약 이미 때를 놓쳤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기다려야 한다.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는 물의 흐름을 억지로 방향을 틀어서 위로 흐르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때가 언제 오는지, 아니면 그때가 오지 않을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자신의 삶에 충실하면서 기다리는 것이 방법이다. 더 정확하게는 ‘기다리지 말아라’는 것이다. 흐름은 기다린다고 오거나 기다리지 않는다고 오지 않는 것이 아니다

분노를 두려워하면서 자신 안에서 자연스럽게 분노가 돌출된다. 분노 속에는 자신의 고통이 숨어 있다. 분노가 잘못됐다고 부적절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분노를 다루는 법을 모른다면 그들의 문제로 남게 된다. 불행하게도 그 분노가 상실의 분노라는 것을 알게 된다. 치유하는 방법으로는 분노를 허락하고 존중해주는 것이다. 때에 따라서 혼자만의 공간을 찾아 분노를 밖으로 꺼내는 것도 좋다. 즉 소리를 지르거나 욕을 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방법이든 유익한 시간이 된다.

분노라는 감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실의 고통에서 나온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고통은 사람마다 전혀 다른 형태로 남아 있지만 슬픔을 애도하는 충분한 시간을 배려했을 때 치유가 이루어진다. 눈물과 울음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눈물이나 울음은 최고의 감정표출, 정화작용 등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슬픔이나 고통을 느낄 때는 쏟아내어야 할 눈물이 충분히 빠져나오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눈물은 마음을 정화(승화) 시켜주는 작용을 하며 상처치유의 효과를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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