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톡톡: 백 예순네번째 이야기] 왜 우리 기업이 돈을 내야 하나

한국인 위령탑 건립위원회가 지난 1975년 8월 일본 오키나와 평화공원 내 세운 위령탑 건립비. 황재돈 기자.
한국인 위령탑 건립위원회가 지난 1975년 8월 일본 오키나와 평화공원 내 세운 위령탑 건립비. 황재돈 기자.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한국의 청년들이 일본의 강제 징모로 대륙과 남양 여러 전선에 배치될 적에 이곳에 징병 징용된 사람 1만여명이 무수한 고초를 겪었던 것만이 아니라 혹은 전사도 하고 혹은 학살도 당하여 아깝게도 희생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일본 오키나와 평화공원 내 한국인 위령탑 건립비 中) 

정부는 지난 6일 일본 강제 동원 피해자 배상안을 발표했다. 2018년 대법원에서 강제 동원 배상 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에게 정부 산하 재단(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배상금을 지급하는 안이다. 

정작 일본제철이나 미쓰비시중공업 등 전범 기업은 쏙 빠졌다. 이름하여 ‘제3자 변제 방식’인데,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때 일본에서 받은 돈으로 사업을 키워 덕 본 국내 기업들에게 돈을 걷어 피해자들에게 준다는 얘기다. 가해자에게 받아야 할 돈을 왜 우리 기업이 대납해야 하나. 

정부는 잔뜩 꼬인 일본과 관계를 더 이상 내버려 둘 수 없다는 입장이다. 북한의 핵 개발을 막고, 반도체 분야에서 힘을 모으는 등 안보·경제 분야에서 일본과 손잡고 대응해야 할 일이 많은 만큼, 국익을 위한 ‘통 큰’ 결정이라는 것이다. 

강제 동원 문제는 이미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됐다고 주장하는 일본이 앞으로도 사과나 돈을 낼 의지는 없어 보이니, 국내 기업에라도 받아서 피해자를 구제하겠다는 심산 같다. 일본으로선 쾌재를 부를 일이다. 민감한 과거사인 ‘징용 문제’를 떼어냈으니. 앓던 이가 빠지고, 손 안 대고 코 푼 격 아니겠나. 

일본은 다음 주 윤 대통령을 초청해 한일 정상회담 하는 걸로 ‘성의 표시’할 테고, 미국도 다음 달 국빈 초청해 대통령의 ‘결단’에 화답할지 모른다. 피해자들은 아무리 “동냥 같은 돈은 안 받는다”라며 화내고 소리쳐도. 정부는 일본과 관계 회복과 미국과 동맹이 먼저라는 조급증에 걸린 것 같다. 

정부 배상안이 국익에 부합하더라도,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한 건 큰 실책이다. 지난 2015년 위안부 합의가 비판받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당시도 상당한 반발에 부딪혔다. 피해자들과 충분한 협의나 정보를 공유하지 않은 채 밀실 합의 속에 갑자기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번 역시 피해자 중심, 국민적 공감대 형성, 사회적 합의 과정을 생략해 만만치 않은 후폭풍을 겪고 있다.

역대 정부는 진영을 떠나 일제 강제 동원 문제만큼은 신중하게 접근했다. 무 자르듯 단칼에 해결할 사안이 아니었다는 의미다.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 역시 장기간 소송을 통해 얻어낸 법적 결과물이다. 그것도 대법원 전원합의체 결정을 통해 받은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사법적 권리였다. 

송두환 국가인권위원장은 “인권침해 행위에 대한 가해자의 인정과 사과가 없는 채로, 더군다나 제3자 변제 방식으로 배상 문제가 해결됐다고 평가하는 것은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윤 대통령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자유와 인권, 법치를 강조하는 지도자다. 그런 지도자가 피해자의 인권과 사법적 권리를 강제 종료하려는 상황은 매우 역설적이다.

좋다. 백번 양보해서 윤 대통령 말대로 일본이 우리와 “협력 파트너”라고 치자. 하지만 과거 불법적 식민 지배와 침략 전쟁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요, 청산하지 못한 현재다. 과거와 현재를 건너뛰고 어떻게 미래를 향해 손을 잡겠다는 건가. 전범국에 거저 면죄부를 주는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이번 정부의 강제 동원 피해자 배상안은 번지수가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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