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득이심리상담센터 박경은 철학박사(심리학 전공)
가득이심리상담센터 박경은 철학박사(심리학 전공)

상처와 상실감으로 고통스러운 당신에게 스스로 묻는다. “당신은 누구인가?” 마음속이 한순간이라도 고요한 적 없이 혼란과 괴로움뿐인가? 인생이 가시밭길처럼 느껴지거나 나만 뒤처지고 패배한 듯 느껴지는가? 질투, 서운함, 수치심, 열등감, 분노 등 마음을 흩뜨리는 많은 부정적인 감정들로 스스로를 상처내고 있는가?

당신이 입은 모든 상처들을 허용한 이는 바로 다름 아닌 당신이다. 나를 모르고는 내 상처를 볼 수 없다. 나를 알고 나의 상처를 자연스레 수용할 때 치유는 시작된다. 내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살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끌려 살게 되면 결국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게 된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 가능할까? 제대로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내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도 세상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그 가운데 있는 나의 존재를 제대로 지각해야 비로소 진정한 ‘나’로 존재하며 자유로워질 수 있다. 바로 이 순간부터 나의 상처도 이해되기 시작한다. 

상처와 상실감은 관계에서 비롯된다. 즉 인간관계는 어느 한 쪽이 먼저 마음을 정리하면 상대방의 생각과 마음은 저절로 타인에 의해 결정이 된다. 즉, 어느 한 쪽이 미리 마음을 정리하면 다른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별통보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상실감을 경험한다. 이러한 경우는 너무나 흔하다. 단지 자신이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관계정리를 하는 쪽이 내가 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한다. 이 말을 다른 관점으로 해석해 본다면, 우리 모두가 피해자가 될 수도, 가해자가 될 수도 있으므로 누구의 잘못(탓)이라고 꼬집어서 말 할 문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 날, 유치원 다니는 아이가 "엄마,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면서 엉엉 울었다. 그리고 "엄마, 외로워" 라고 했다. 7살 아이가 외롭다는 표현을 알고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대로 달려와 엄마의 품에서 엉엉 울었다. 이런 상황에서 부모는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해 줄 수 있을까? 아니면 어떤 가르침이 필요할까? 이럴 때는 그저 아무 말 없이 울고 있는 아이를 꼭 안아주는 것이다. 아이는 어떤 방법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잔소리와 같은 가르침을 받고 싶어서도 아니다. 7살 밖에 되지 않지만 아이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이 해결해 나가야 하는 삶의 숙제라는 것을. 어린 아이들도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무의식에서는 삶이 녹록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자신을 얼마만큼 타인에게 허용해야 하며, 자신의 행동이나 마음가짐에 따라 상처크기가 다르다는 것을 직감으로 안다는 것이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서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어 한다. 덜 아프고, 덜 외롭도록 또는 친구를 만들어 줄 수도 없지만 마음의 평안이 있기를 매순간 기도한다. ‘자신이 입고 있는 모든 상처는 자신 스스로 허용했다’는 말을 비유적으로 설명해보면, 신발에 아주 작은 모래알 하나라도 있으면 그것을 치우기 전까지 계속 신경이 쓰이고 불편하다. 즉, 마음에 아주 작은 욕심이라도 있으면 어느새 작았던 욕심이 거대해져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다. 그 후 이유도 모르는 채, 왠지 모를 우울과 무기력이 잠긴다. 불편한 감정에 집중을 하다보면 그 불편함이 어느새 커다란 불만덩어리를 부풀어있음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또한 그 마음을 키운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 더 우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고 하자. ‘콩깍지가 씌어졌다’는 것처럼 오롯이 그 사람만 바라보면서 사랑만큼 행복한 것은 없다고 믿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랑이 집착으로 변한다. 그 이유는 너무 좋으니까 혹시 뺏기거나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다. 모든 행동의 일거수일투족을 간섭하고 자신의 전화는 바로 바로 받아야 하며 누굴 만나는지, 또는 자신 외에는 아무도 못 만나게 하는 병리적인 형태로 변질이 된다. 그러한 형태를 어느 누가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그 굴레를 만들다보니 상대방도 힘들고, 정작 자신은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지도 모르는 채 상대방 때문에 자신이 상처를 받고 힘들다고 말한다. 

서로가 건강한 연인이 되기 위해서는 병리적인 형태를 과감히 깨야 한다. 그러나 집착에서 탈피될 때까지의 고통은 처절하리만큼 아프다. 탈피 안하면 되지 않나요? 라고 묻는다. 그것은 각자의 선택이다. 어떤 것을 선택할지는 모르나 탈피하지 않으면 점점 더 병리적인 증상들이 가중 된다는 사실을 피해갈 수는 없다. 내가 네가 될 수 없고, 네가 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즉 내 일이 타인의 일이 될 수 없듯이, 타인의 일 또한 내 일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마음과 감정은 나눌 수 있다. 우리가 건강한 인간관계를 하기 위해서는 마음과 감정을 나누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이 ‘자신’의 경계를 넘어오지 않도록 잘 지켜야 한다. 그것이 결국 자신이 상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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