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남의 힐링고전]

김충남 강사.
김충남 강사.

'지하철 안에서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였다'

이것은 선천적 마음에 의함인가? 인위적 학습에 의함인가? 머리에서 시킨 것인가? 가슴에서 시킨 것인가?

지금부터 2300여 년 전 중국 전국시대 사상가인 맹자와 순자에게 그 답을 물어 보았다.

▴ 선천적 마음에 의함이다?
맹자는 이렇게 답하였다.

‘인간 누구나의 마음속에는 가엾은 사람을 보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인 측은지심(惻隱之心)과 같은 선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보았을 때 누구나 달려가서 구해 주려는 마음이 발동하게 되는데 이것은 순간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측은지심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측은지심은 인위적으로 배워서 된 게 아니라 인간 누구나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다. 따라서 임산부나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발동한 선한 마음인 측은지심에 의한 것이다’라고 답하였다.

▴ 인위적 학습에 의함이다?
이에 맹자보다 60년 후에 태어난 순자는 반론을 제기했다.

‘인간 누구나의 마음속에는 나만을 위하려는 이기심, 동물적 본능에 의한 욕망을 가지고 태어난다. 맹 선배께서 주장한 측은지심 같은 선한 마음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교육과 학습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 역시 학습과 교육에 의한 것이다’라고 답하였다.

지금까지 맹자와 순자의 상반된 주장을 들어 보았다.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선한 마음에 의한 행동이라는 맹자의 주장, 학습이나 교육에 의한 인위적 행동이라는 순자의 주장,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 할 수 없이 모두 일리가 있다 하겠다.

▴ 머리의 작용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머리의 작용에 의함인가? 가슴의 작용에 의함인가?

머리의 작용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머리는 사물의 이치를 분별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작용을 한다. 따라서 머리는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는 판단을 하여 그렇게 하라고 가슴에 명령을 내린다. 이처럼 머리의 작용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판단하는 작용으로써 비교적 간단하고 명료하다.

▴ 가슴의 작용
그러나 가슴, 즉 마음의 작용은 복잡 미묘하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누구나 자기를 위한 마음인 이기심, 동물적 본능에 의해 편안해 지려는 욕망이 있다. 이것은 인간 누구나 가지고 있는 원초적 마음이요 욕망이다.

예를 들어 보겠다. 과자를 본 아이는 양보하지 않고 자기 혼자 먹으려 한다. 이것은 이기심으로써 누구나 지니고 있는 원초적 마음인 것이다.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것은 편안해 지려는 동물적 본능에 의한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다. 따라서 지하철 안에서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면 이것은 단지 인간의 원초적 마음과 동물적 본능에 따랐음이라 하겠다.

그러나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원초적 마음과 욕망을 다스리는 또 하나의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생각(思)이다. 생각을 통해서 원초적 마음과 욕망을 통제하고 다스리는 것이다. 먹을 것이 있을 때 동물은 무조건 뜯어 먹지만 인간은 생각하고 난 뒤 먹는다. 그래서 식의주(食衣住)가 아니라 먹기 전에 옷(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대한 생각을 먼저 하는 의식주(衣食住)인 것이다.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원초적 욕망을 다스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머리의 작용에 의함이 아니라 마음의 작용에 의함이라 하겠다.

▴ 머리에서 가슴, 그리고 발로 가야한다 
옛글에 ‘배움은 나의 보배요, 배운 자는 세상의 보배니라(學者乃身之寶 學者乃世之寶).’하였다. 배움이 보배가 됨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배운 자가 모두 세상에 보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배운 자가 역사와 세상을 어지럽게 만들었음이 허다하다.

지금 우리 사회를 어지럽게 한 자들을 보면, 거의가 배운 자들인 사회 지도층 인사가 아닌가. 그들의 머리는 명석하였으나 삿된 마음과 욕망을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파멸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께서 말했다. 자신의 삿된 마음과 욕망을 잘 다스려 바른 도리로 사는 것이 인(仁)이다 (克己復禮爲仁). 양명학의 창시자인 중국 명나라의 왕수인은 아는 것(知)이 행(行)으로 이어져야 참된 앎이라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했다. 다시 말해 머리로 알고 있는 정도(正道)가 가슴으로 내려가 발로 이어져야 참된 정도(正道)인 것이다.

▴ 그렇다.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는 불과 30cm인데 머리의 지(知)가 가슴의 심(心)으로 내려가 발의 행(行)까지 이르는 데는 왜 그리도 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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