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은의 힐링에세이]

박경은 가득이심리상담센터 대표
박경은 가득이심리상담센터 대표

한 때 사람에 대해 큰 상처를 입었을 때, “나만큼 사회생활 잘하는 사람 있나봐라. 너는 진짜 사회생활 못해.”, “나만큼 의리 있는 사람 없어. 너 더 이상 내 얘기 다른 사람한테 하지 마.” 이런 말들이 그 때 당시에는 자책을 하게 되고 죄책감으로 왔었다. 시간이 흐른 뒤에 곱씹어보니 비난과 타인무시, 정서적 학대(협박) 등 그 사람이 의리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거짓의 사람’이란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마치 의리 있는 사람이 비밀을 잘 지키는 사람처럼 동일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비밀이니까 꼭 너만 알고 있어야 돼." 라는 말은 이미 비밀이 아니다. 자신 외에 한명의 사람이라도 어떤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그것은 이미 비밀이 아니라 숨겨진 진실을 품고 사는 힘든 일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비밀처럼 말하면서 소문을 퍼트린다. 즉 “그 사람한테 얘기하면 모두한테 얘기하는 거나 똑같은 거니까 비밀처럼 이야기를 하면 덫에 걸리게 될 거야” 이런 의도를 가지고 사람을 악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범인을 잡기도 하고 갈등을 야기 시켜서 자신을 것을 취하는 경우가 많이 나온다. 의리가 있는 사람과 비밀을 지키는 사람은 전혀 다르다. 의리가 있는 사람은 자신의 이득을 따지지 않고 상대방을 지켜준다. 그러나 비밀을 잘 지키는 사람은 어쩌면 ‘타인의 감정에 무심한 사람’이라고 말해도 될 정도로 자기중심적이고 거짓의 옷을 두텁게 입고 있는 사람(거짓의 사람) 일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드라마 속의 사람들 중에 국민들을 생각하는 척, 나라를 걱정하는 척, 나라의 비밀을 악용하는 정치인들과 높은 관직에 있는 공무원들, 그리고 탐욕으로 가득 찬 사람들을 보시면 조금 이해가 될 것이다. “이건 비밀이었는데 말해 줄게요”라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비밀보다는 자기노출을 하는 것이다. 자기노출은 시간의 차이를 둘 뿐 언젠가는 주변 사람들이 알게 된다. 그러나 그 비밀이 타인의 이야기이고 ‘비밀을 잘 지킨다’고 말하는 사람이 비밀을 지키는 것은 타인의 대한 무관심이 크기 때문이다. 즉 비밀을 지켜주고 싶어서가 아니라 관심이 없어서일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는 이런 말까지 덧붙인다. “나는 의리 있고, 너처럼 다른 사람에게 얘기하지 않아” 라고 무언의 협박으로 정서적 괴롭힘을 강요당하기도 한다. 서로가 서로의 감정을 대화로써 공감 받고 잘못을 인정하고 위로가 되었다면 굳이 다른 사람에게 아픔을 이야기할 필요까지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과정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라도 호소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억울함’이라는 감정이다. 사실 그 ‘억울함’ 감정 속에서 자신을 탐색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나는 의리 있고, 너처럼 다른 사람에게 얘기하지 않아” 이런 사람을 저는 ‘거짓의 사람’, ‘탐욕의 사람’이라 칭한다. 그 이유는 상대방에게 무서운 칼날로 여러 번 죽였기 때문이다. 먼저 자책을 하게 하는 말이다. 그리고 죄책감을 심어주는 말이다. 더 나아가 자신은 ‘꽤 괜찮은 사람’으로 포장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으로 생긴 아픈 상처를 공감하기는커녕 ‘약한 사람, 의리 없는 사람’으로 지속적으로 정서적 학대를 함으로 자신이 얻는 것은 약한 사람을 좌지우지하는 무언의 권력을 얻게 된다. 그것이 그 사람의 ‘탐욕’이다.

‘거짓의 사람’은 어떻게 형성이 되었을까? 발달단계에서 어떤 장애물을 만났을까? 부모의 부재, 불안정 애착, 가족 내의 희생양(책임), 내면화 된 수치심, 굳어버린 열등감, 존재의 두려움, 뒷받침할 수 없는 환경에서의 기질적인 성향의 부정적 강화 등 다양한 요인들이 있다. ‘거짓의 사람’은 겉옷이 꽤 화려하다. 사람들은 속임을 당한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사실 속임을 당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것이 ‘공생하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거짓의 사람’은 근원은 인정욕구, 존재에 대한 드러냄, 외로움이다. 겉으로는 세상을 다 품을 사람처럼, 봉사정신이 투철한 사람처럼, 자신을 낮추면서 겸손의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그 또한 익숙한 삶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마치 그 모습이 ‘진짜 자기’처럼 착각할 수도 있다. 무엇이 맞고 틀린 것은 없다. 다만 양심과 따뜻한 인간애가 상실되어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게도 삶은 참으로 중요하다. 비난이 아니라 안타까움과 ‘자신 안에 있는 어린아이는 얼마나 아플까? 언제까지 피눈물을 흘리게 내버려둘까?’라는 측은함이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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