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문산 과례정의 벽시계
보문산 과례정의 벽시계
  • 김경훈
  • 승인 2020.01.10 11: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경훈의 공감소통]

김경훈 방송인.

겨울답지 않게 많은 비가 내렸다. 김(글쓴이 본인)은 운동화 끈을 질끈 동여매고 보문산에 올랐다. 다람쥐 쳇바퀴처럼 매번 똑같은 코스를 돌았다. 문화광장을 시작해서 과례정을 거쳐 처음의 자리로 다시 되돌아오는 한 시간용 산행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삼일동안 계속 내린 비로 계단은 미끄러웠고 땅바닥은 밀가루 반죽처럼 질퍽했다. 비탈진 구간에선 하마터면 구를 뻔했고, 가파른 계단에선 까딱하면 미끄러질 뻔 했다. 재수 없는 날이라며 김은 투덜거렸다. 젠장, 이런 날 산에 올게 뭐람.

간신히 능선까지 올라온 김은 과례정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실 김은 과례정을 싫어했다. 산이 산다워야지 왜 여기에 왜 팔각정을 지었단 말인가. 김은 매번 이곳을 지나칠 때마다 과례정을 만든 사람을 욕했다.

하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었다. 외부의 벤치가 모두 비에 젖은 탓이다. 과례정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긴 이렇게 비바람이 치는 날에 누가 산에 온단 말인가. 앉아서 휴식을 취하던 김의 눈에 벽시계가 보였다. 시계는 과례정 여덟 개의 기둥 하나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거실에 있을 법한 벽시계를 누가 여기에 달아 놓은 것일까. 김은 그의 노고와 배려에 잠시 감사했다.

그런데 시계에서 뭔가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다. 정오가 훨씬 지난 시간이었는데도 작은바늘이 아홉시를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장인가? 김은 몸을 움직여 시계로 가까이 다가갔다. 초침이 움직이지 않는 걸 보니 이상이 있는 게 분명했다. 김은 문득 벽시계가 자신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창 일을 해야 할 시간에 하릴없이 산에 올라 온 자신이나, 말뚝을 박아 놓은 듯 초침과 분침이 움직이지 않는 시계.

김은 거기에 오랫동안 앉아있었다. 시계는 다시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 저걸 다시 작동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건전지를 갈아 끼우면 움직일까? 민원을 넣으면 대전시설관리공단이나 대전공원관리사업소에서 여길 와줄까? 언제? 한 달 후에? 이런 생각이 들자 김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다음날 아침, 김은 집을 나서며 신발장 위에 있던 더블A 건전지를 점퍼주머니에 넣었다. 간밤에 싱크대 서랍을 뒤져 꺼내 둔 물건이었다. 점심을 먹은 뒤 김은 다시 보문산에 올랐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찬바람이 성난 짐승처럼 김의 두 뺨을 할퀴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올라갔다. 영하로 내려간 날씨 탓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건전지를 든 김은 명령을 완수하려는 군인처럼 계속 올라갔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김은 숨을 헐떡이며 과례정으로 들어갔다. 벽시계가 김에게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나 때문에 온 거지? 김은 시계를 내리고 곧바로 건전지를 교체하는 작업을 했다. 새로운 건전지를 끼우자 초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뭔가를 해냈다는 기분에 김은 기뻤다.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낸 의사처럼 뿌듯함도 들었다.

나의 작은 수고로움이 타인의 삶을 윤택하게 한 것이 아닐까.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김은 산을 내려갈 채비를 시작했다. 패딩의 지퍼를 끝까지 올렸지만 매서운 바람은 날카로운 바늘처럼 몸속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김은 춥지 않았다. 오히려 슬쩍 웃기도 했다. 걸음을 옮기며 김은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를 중얼 거렸다.

“다시 움직이는 시계처럼 나도 내 삶을 움직이리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